싫은 사람 옆에선 숨도 쉬지 않는 여자
뇌와 콧구멍 간의 메커니즘은 대략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데, 눈이 내 앞에 있는 인물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인 후 빠른 시간 내에 뇌에 전달하여 좋아하는 사람인지 싫어하는 사람인지 구분한다. 그 후 콧구멍을 키워도 될지 잔뜩 줄여야 할지 선택하여 적용하는데, 콧구멍을 줄이기로 했다면 당장 코의 가장 안쪽과 목구멍의 경계에 있는 문을 닫아줘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냄새를 맡게 될 테니까.
나의 뇌는 근래 나에게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기준으로 콧구멍을 막아야 할 사람과 막지 않아도 될 사람을 구분한다. 시시각각 콧구멍을 차단하는 상대가 아주 제각각인데, 요즘 나의 콧구멍은 부서장에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
부서장은 하루 2번 커피를 내리러 탕비실에 들린다. 아침 9시경, 점심시간 후 오후 1시경 이 두 시간대에 꼭 한 잔씩 커피를 마신다. 불과 4개월 전에는 부서장과의 거리두기를 엄두도 내지 못했던 터라 이 두 시간대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부서장은 예전에도 술은 왜 살쪘냐 뭘 먹었냐, 왜 아프냐 신랑이 괴롭히냐 등등의 괴롭힘은 다 그를 마주치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당한 말을 들어도 내가 예민한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는 자책을 했는데 이제는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되도록 동선을 겹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자칭 '미어캣'인 나는 20명 정도인 부서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들만 들어도 대략 분위기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 본래 기획팀이었던 나는 후임과 맞교환이 되어 그 아래의 팀으로 가게 되었는데(당시 나는 좌천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두드러기들을 그때 만나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한번 기획팀의 인원 대부분이 회의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날 친한 동기와 점심 약속이 있었던 나는 어서 어르신들이 식사하러 나가시기를 기다리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내 앞자리에 앉아있는 후배 하나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나에게 대뜸 1팀인지 2팀인지 묻는다. 나는 대답을 하고 다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후배는 회의에 간 기획팀의 다른 선배들을 대신해서 부서장과 1대1로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평소의 나였으면 "왜요? 무슨 일이에요?" 했을 텐데 나는 필요한 말만 하고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급하게 다른 팀의 선배들에게 이런 저런 걸 묻더니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는다. 곧이어 부서장이 밖으로 나왔고 후배와 단둘이 식사하러 가게 된 부서장이 난감하고 어색해하며 굳이 멀리 있는 나에게 묻는다. "공대여자 식사 안 해?" 나는 미어캣처럼 고개만 내밀고 "네. 저는 약속이 있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했다.
불과 몇 개월 전의 나는 후배의 난감한 상황이 나의 상황인 것처럼 아등바등하며 약속을 취소해야 하나 어디로 식사를 가야 하나 했을 텐데 거리두기를 잘 해냈다는 생각에 점심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만 같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또 생겨도, 그때는 점심 약속이 없어도 약속 있다고 말하고 되도록 피해야지. 좌천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업무 분장이 거리두기에 이렇게 도움이 되는 조치였다니. 이제 보니 감사할 일이 한두개가 아닌 인생이다.
부서장이 주는 일은 항상 아기 새가 받아먹는 것처럼 낼름 받아먹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부서장이 일을 시키는 루트는 다양하다. 팀장님에게 일을 시켜서 업무를 우리가 하달받도록 하는 방법. 본인 방에 불러서 다짜고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상대방이 잘 대답을 못 하면 잔뜩 주눅 들게 하고 기를 죽인 후 일을 지시하는 방법. 아니면 본인 방에서 직접 나와 실무자의 책상에 찾아와 일을 시키는 방법.
지난주의 중간쯤 부서장이 방에서 나오며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서 점점 내 자리로 걸어온다. 콧구멍을 줄여본다. "공대여자. 요즘 바빠?"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나는 이 질문이 분명 "내가 일을 줄 건데, 너는 바빠도 안 바쁘다고 해야 한다." 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척 이렇게 말했다. "네. 바쁜 것 같습니다." 부서장이 당황한다. "어? 바빠? 왜?"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현장 관리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시공사에 챙겨줄 게 많아서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그러시나요? 시키실 게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봐 주길 부서장은 바라고 있겠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는 나에게 부서장은 한 박자 쉬며 일을 시킨다. 후임에게 업무분장이 넘어간 일을 굳이 나에게 찾아와서 시키는 부서장이라니.
그때 타이밍 좋게 후임이 자리로 돌아온다. 부서장은 말을 이어간다. "이걸 저렇게 요렇게 할 수 있는지 검토해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후임이 대신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부서장은 계속 나를 본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 지시하신 내용을 확인하는 척한다.
업무분장이 바뀌어 내 일을 빼앗겼다고 울고불고했던 4개월 전의 공대여자였다면 벌떡 일어나서 "넵! 넵! 알겠습니다!" 했을 텐데 이 업무를 시키면서 나의 거리두기를 무산시키겠다는 의도인 듯하여 나는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부서장은 퇴직하고 길에서 만나면 인사를 할까 말까 한 아저씨일 뿐이다.
엄청나게 거대하게 내 앞에 버티고 서서 나를 이리저리 괴롭히는 무소불위의 권력처럼 보이던 부서장을 '나중에는 그냥 아저씨일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졌다. 부서장 앞에서 여전히 콧구멍은 줄어들겠지만, 그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나의 마음과 몸을 보호해나갈 것이다.
효과적인 치료는 정서의 환기, 정서의 경험, 그리고 후속하는 감정의 분석과 통합을 번갈아가며 배열함으로써 이루어진다.(치료의 선물, 어반 얄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