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 팥칼국수가 요즘 엄청 먹고 싶다. 집에서 팥 끓여서 밀가루 막 주물주물해서 동그랗고 납작하게 펴서 돌돌 말아 칼로 잘라서 만드는 거 있잖아."
요 몇주 신랑에게 팥칼국수 노래를 불렀다.
"오빠 내가 집에서 팥칼국수 도전하면 같이 먹어줄 거야?"
평소 요리에 크게 관심이 없고 할머니와 엄마랑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나의 실력을 신뢰할 수 없었던 신랑은 이렇게 말했다.
"마망아 우리 그거 포장해와서 집에서 같이 먹을까?"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입을 삐죽거렸다. 왠지 모르게 날이 추워지니 팥칼국수가 먹고싶어졌는데 팥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신랑이 밍숭맹숭하니 서운했다보다.
며칠 전 길을 가다 팥칼국수 가게가 어디 없나 하고 두리번 거렸는데 마침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가게가 하나 눈에 띄었다.
그 가게 간판에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는데 매해 붙였다 뗐다 하시는지 색이 조금 바래있었다. 그 모습이 괜시리 정감이 가서 현수막을 찬찬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동지 팥죽, 팥칼국수 합니다."
'아. 동지가 다가오는구나. 그래서 계속 팥칼국수가 생각났나?동지가 지나기 전에는 꼭 팥칼국수를 먹어야겠어!'
나는 엄청나게 맛있는 팥칼국수를 위해 그날의 호사를 조금 뒤로 미뤘다. 아끼고 아껴뒀다 먹어야 훨씬 맛난 법이니까.
며칠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일요일이었던 이틀전, 지방 결혼식을 무척 긴장하며 다녀온 탓에 온몸이 피곤했다. 요즘 부쩍 나빠진 체력탓에 방전을 대비하여 미리 월요일 하루 휴가를 낸 것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루던 운전면허증 갱신도 하고 엄마가 집에서 챙겨준 오래된 내 명의의 통장도 해약할 겸 외출을 했다.
새마을금고에서 만든 통장에는 출자금 몇만원이 다라며 이거라도 잊지말고 찾아서 쓰라는 친정 엄마의 당부가 생각나서 통장을 열어보았다. 3개의 통장에 마지막으로 찍힌 돈은 출자금 뿐이라 모두 합쳐도 7만원이었다.
지방의 다른 지점에서 만든 통장을 3개나 들고가서 비밀번호도 바꾸고 해약도 하려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금고 직원분의 안내에 따라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하고 몇몇 서류에 서명하고 나니 총 잔액을 알 수 있었는데 무려 90만원이 넘었다. 7만원 찾으러 왔다가 6년전의 마망이가 왜 넣어뒀는지도 기억나지 않은 돈을 지금의 내가 받게된 것이었다 .
"감사합니다. 7만원 찾으러 왔다가 횡재한 기분이네요." 하고 직원분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내가 찾아간 곳 주변에는 큰 시장이 있었는데, 왠지 이 곳에는 진짜 팥칼국수 집이 있겠다 싶어 홀린듯이 시장 가운데로 들어갔다.
팥칼국수는 선불이며, 1그릇에 7천원이었다.
돈을 내고 힌참을 기다리니 할머니의 팥칼국수와 많이 닮아있는 한 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팥칼국수는 우선 숟가락으로 한번 떠먹어야해' 팥칼국수에 진심인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숟가락을 입에 넣었고, 국수집 사장님 또한 팥칼국수에 진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칼로 무심한 듯 잘라서 중간 중간 아주 얄포롬 한 부분이 있는 칼국수가 참 좋다. 밀가루가 두텁게 씹히는 것보다 약간 불어있는 듯하여 후루룹 팥과 함께 입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칼국수처럼 흐물흐물하고 팥이 잔뜩 스며있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맛있는 팥칼국수 한그릇을 박박 긁어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혀가 얼얼한게 어제 조금 급하게 먹었나보다.) 본래 나는 가장 맛있는 것은 아껴놨다 가장 나중에 먹는 성격이라 이번에도 잘 참아내었구나. 그래서 그 덕에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팥칼국수를 최고의 맛으로 맞이할 수 있었구나.
밥을 먹으니 집 생각이 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통장에 돈이 생각보다 많이 있어서 놀랐어." "그래? 네가 언제 넣어놨었나보다." 오랫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 두런 나눴다. 이야기 말미에 엄마는 할머니가 요즘 다시 몸이 많이 안좋아지셨다 말한다.
일전에 계단에서 미끄러지셔서 다치셔서 크게 아프신 후 괜찮아지셨는데 그 후 부쩍 기력이 쇄해지셨나보다.
"할머니 전화 바꿔드릴게. 이야기 좀 해."
할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가"
할머니의 목소리만 들어도 병원에 갈 정도인지 하루 쉬면 나을 정도인지 아는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할머니가 온몸에 힘이 없어져버린 듯한 목소리였다.
"할머니 많이 아파?"
"아니여. 나는 인자 오래 살았은께. 장서방이랑 느그들만 건강하믄 된다잉. 아프지 말고. 코로난가 뭐시긴가 조심하고잉?"
"우리는 걱정하지마. 다 젊은데 뭐 그런 걸 걱정해. 아프지 마 할머니."
할머니와의 통화를 마치고 한참을 식탁의자에 앉아있었다. 겨울이 되서 팥칼국수가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할머니 생각이 나서 먹고싶었던 거구나. 할머니도 내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멍하니 식탁의자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냉장고에 있던 쉬어버린 열무김치를 꺼냈다. 유튜브에 '익은 열무김치 볶음'을 치니 수십가지의 동영상이 나온다. 너무 짠 것 같아서 물을 많이 넣었다가 간장을 넣었다가 너무 신 것 같아서 올리고당을 넣었다가 졸이다가를 반복하니 양이 너무 많아졌다.
퇴근하고 온 신랑이 너무 맛있다며 맛있게 먹었다. 실패하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잘 먹어주니 너무 뿌듯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시간과 공과 정성을 들여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고 손에 물을 묻혔다가 양념을 묻혔다가를 기꺼이 반복하는 고생을 알게되는 걸까. 얼굴을 마주하고 그 한 그릇을 함께 먹을 때의 냄새와 분위기와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지는 걸까.
분명한 건 나도 할머니처럼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음식들을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배워나가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