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핑크돼지 이야기

돼지바 못 먹는 여자

by mamang


돼지. 돼. 지. ㄷ . ㅙ . ㅈ . ㅣ.

그대는 돼지라는 단어를 듣거나 읽으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토실토실하고 귀여운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조롱하고 싶은 이가 생각나는가. 그도 아니면 먹음직스럽다거나 혐오스러운가.


여기 왕년에 돼지라는 놀림을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돼지바도 먹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물론 그녀는 안다. 사랑스러운 딸기잼을 품고 있는 흡사 거친 흙과 같아 보이지만 그 아이스크림은 너무나 달콤하고 맛있다는 것을.


그러나 돼지라는 단어가 그녀의 왕년을 가득 채워버렸으니 성인이 되고도 훨씬 지난 지금도 쉬 먹지 못한다.


맞다. 그녀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본인임과 동시에 소아비만이었던 탓에 여전히 뚱뚱한 세포를 안고 있는 가련한 여성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뚱뚱 또는 통통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자연스레 나의 배에 자리 잡은 볼록한 살은 나의 가장 오랜 친구이다. 결혼식을 위해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을 당시에 보기 드물게 나의 배가 (잠시) 납작했었는데. 결혼식에 왔던 내 친구들이 신부 화장보다 더 놀란 게 내 뱃살의 부재였으니까.


아무튼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나는 항상 '비만'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마치 '영원히 날씬해질 수 없는 아이'라는 저주 같았다.


나의 탄생으로 바삐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략 아비규환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나를 잉태한 엄마의 배는 영락없이 '아들 배'라는 주변인들의 인정을 받았었다고 한다. 엄마는 드디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몹시 컸다고 훗날 증언했다. 딸 둘을 연달아 낳았던 엄마는 '아들 못 낳는 설움'에서 벗어나는 게 소원이었고. 아들의 탄생과 함께 남편의 바람기도 집에 꽉 묶어둘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아들 배'를 가진 자격으로 시집와서 처음 귀한 대접을 매일 받았다. 각종 진귀한 음식으로 보양을 했고 배는 날로 부풀어졌다.


드디어 산달이 되었고 엄마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은 귀한 셋째 아들이자 장손이 될 나의 탄생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아들 같은 생김새를 한 딸로 태어나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산부인과에서 펑펑 울었고 아빠는 밖에서 술을 먹다가 펑펑 울었고 나는 엄마 뱃속에서 먹던 진귀한 음식들이 그리워 펑펑 울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펑펑 울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는 광어와 같았다. 바다 저 깊은 물속에서 모래와 같은 색깔을 하고 납작 엎드려 목숨을 부지하며 살을 찌워가는 광어 말이다.


"너 낳느라 죽는 줄 알았다."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다. 하도 귀한 걸 많이 먹어서 4.2킬로그램으로 커버린 나를 낳느라고 정말 죽을 뻔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너 낳고 죽고 싶었다."는 말로 들리는 이유가 뭘까.


어쨌든 얼굴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자 4.2킬로그램의 자이언트 베이비이자 딸인 줄 알았으면 태어나지 못했을 나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나는 그 이후 꾸준히 자라 자이언트 베이비, 자이언트 어린이를 거쳐 자이언트 중학생이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동네 도서관에 시험공부를 하러 갔던 날이었다. 주말이기도 해서 특별히 내가 좋아하는 핑크색 잠바를 입고 갔다.


우리 또래 아이들이 다 그랬듯 친구와 나는 손을 잡고 함께 화장실에 갔는데. 어디에 가서 시비를 붙어본 적이 전혀 없던 나에게 세면대 앞에 서있던 여자아이들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뭘 째려봐!! 아오 뚱뚱한 게. 옷 입은 거보니 진짜 딱 핑크 돼지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화도 내지 못하고 따지지도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자리를 피하는 내 귀로 다른 아이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친구들이 같은 초등학교에 가고 비슷비슷한 결의 친구들끼리 중학교 생활을 함께 했다. 몇몇 남사친들이 돼지라고 많이 놀렸기에 단련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들 눈에도 내가 돼지처럼 보일 줄은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내 여자 친구들은 항상 나를 위로해주었는데.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돼지라는 단어가 무서워지기 시작한 게. 그 이후 나는 그 누구도 돼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나를 돼지라고 놀리는 사람에게도 그 말로 복수를 되갚지 않는다.


돼지바를 먹지 않게 된 배경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내가 앞으로 할 이야기는 소아비만이었던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이다. 세포마저 뚱뚱해져 버린 어른으로 자란 탓에 남들보다 쉽게 살이 찌고 웬만해서는 잘 빠지지도 않는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불어 뚱뚱한 과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치유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들의 말미에는 그녀가 돼지바를 마음껏 두려움 없이 먹게 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