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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Aug 01. 2021

디어 마이 복덕

방울 빵과 할머니

방울 빵을 처음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알알이 귀여운 빵들이 설탕을 입고 있었다. 거봉 포도알과 같이 귀여운 방울 빵을 한 개씩 꺼내 먹었다. 내 손에 닿은 그 까슬한 촉감과 입속의 폭신한 식감이 아직 생생하다.


그날 나의 할머니 정복덕 여사는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평소 나에게 전을 부쳐주거나 과일을 깎아주거나 옥수수, 감자를 쪄주었던 할머니였는데, 그날은 비싸 보이는 빵 한 봉지를 선뜻 쥐여줬다.     


7살이었던 나는 빵을 먹다가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하며 곰곰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구나.’ 그날의 할머니는 교회 갈 때만 꺼내 입던 예쁜 긴 주름치마를 입었고 한 손에는 아주 큰 가방을 들고 있었다. 나의 추측은 확신이 섰다. 곧이어 뭔지 모를 우월감이 머리를 내밀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선택받았어. 큰언니 작은언니 없이 우리끼리 집을 나온 거잖아!” 나는 도시 삶을 버틸 수 없었던 할머니가 가장 귀여운 손녀 한 놈만 데리고 귀향길에 오른 거로 생각했다. 아찔한 우리끼리의 일탈인듯했고,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공범이 된 듯했다.   

    

나의 엄마 아빠는 돈은 없는데 딸을 셋이나 나은 젊은 부부였다. 그들은 세 자매를 시골에 있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도시로 나가 일을 했다고 한다. 도시에서 하던 작은 식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야 우리 가족은 도시에서 다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유년기 시절 나의 기억은 도시로 이사 나온 그해부터 시작된다. 나에게는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지끈지끈 머리 아픈 날들의 연속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로 올라와 매일 집안일만 해야 했던 할머니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이놈의 집구석. 어지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지. 내가 얼른 죽어야 제.” 할머니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불안해하던 날들이었다.     


한 번은 할머니와 벽 사이에서 자던 내가 잠에서 깼는데. 할머니는 나를 등지고 모로 누워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어른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아파?” 할머니는 대답 대신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아픈 할머니를 위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한 번은 언니 둘이 학교에서 받은 채변 봉투를 집으로 들고 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 또한 잠시 난감해하다가 신문을 들고 와 마당에 깔았다. 그리곤 나에게 이곳에 응가를 좀 싸달라고 했다. 나는 손쉽게 일을 해치웠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마당에서 궁둥이를 보이고 똥을 쌀 수도 있었다.


아무튼 가출의 그날, 나는 방울 빵을 먹다가 얼렁뚱땅 버스에 올라탔다. 막상 버스에 올라보니 슬슬 할머니와의 일탈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집 바깥의 세상을 잘 알고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한참 후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불안했던 내 마음과 달리 할머니는 익숙한 듯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올려다본 나는 그녀에게서 분홍 꽃처럼 피어나는 복덕을 보았다. 복덕은 어느 집 앞에 도착해 문을 활짝 열었다. 낯선 집에 성큼 한 걸음 내디딘 복덕은 마루에 걸터앉아있는 노인을 “오라버니” 하고 불렀다. 이름을 잊고 지내던 복덕과 동생을 까무룩 잊고 있던 두 노인이 만났다. 납작했던 두 노인이 풍성하게 웃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오빠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할머니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날 때부터 ‘할머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감추고 있던 할머니의 큰 비밀을 알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사실 오빠가 있어.” 언니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복덕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입체적인 복덕의 모습이 아름답고 슬펐기 때문이다.

    

복덕의 오빠를 만나러 떠났던 우리의 짧은 여행 후 나는 7살, 할머니는 60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집을 영영 나갔던 게 아니라 잠깐 할머니의 고향집에 다녀온 것이었고, 나는 유일한 미취학 아동이라 선택받았던 듯했다. 그 다음 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는 주로 할머니 혼자 고향집에 다녀오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복덕과의 여행 이후, 본격적이고 다양한 관계가 우리 사이에 겹겹이 끼어들었다. 엄마 아빠 큰언니 작은언니 나중에는 늦둥이 남동생이 내가 복덕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방해했다. 시어머니에게 자식들을 맡겨놓고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는 우리를 할머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듯했고, 아빠는 가족 모두를 힘들게 했다. 할머니는 언니들과 내가 싸우면 언니들의 편만 들어주는 것 같았다. 9살 어린 남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복덕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 듯했다. 복덕은 나에게 매해 여러 겹의 서운함을 입혔다. 그럼에도 나는 복덕이 나를 위해 지어준 옷, 밥, 잡아준 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복덕에게 배신감과 존경심과 사랑을 혼란스럽게 느끼며 성급하게 키가 자랐다. 사랑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후 나는 몸집만 훌쩍 자란 채 30대를 살고 있다. 이주 전쯤엔가, 머리가 아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넓은 침대에 가로로 누워있는데 어릴 적 우리 집의 여름 풍경이 떠올랐다. 거실에 깔린 시원한 대나무 자리에 등을 대고 누운 내가 다리를 소파 위에 올리고 발을 까딱거리고 있다. 내 옆에 앉은 할머니는 사각으로 자른 수박을 포크에 꽂아 내민다. 머리맡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다. 수박 모양을 한 짧은 여름들이 우리에게 있었다.


방울 빵이 입에서 녹아버리듯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그 시간이 진짜 나에게 있었을까. 짧게 달고 길게 쓰던 그때가 실감 나지 않아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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