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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Jan 04. 2023

방앗잎 키우기

나의 할머니


황정은 소설, <아무도 아닌> 수록 단편 [상행]

• 콩을 젓가락으로 집고 이건 무슨 콩이냐고 묻자 우리집 뒷담에 붙어 자라는 울타리콩이라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 계절이 될 때까지 자라는 대로 내버려두고 비바람에 말렸다가 밥 지을 때 한줌 넣어 먹는 귀한 콩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조그만 노부인은 내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만지작거며 내 뒤에 서서 숨을 쉬었다. 그녀가 코로 내쉬는 숨 때문이 내 왼쪽 정수리 부근이 아까부터 동그랗게 간지러웠다.(17쪽)


< 오늘의 이야기 >


할머니와 매일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집에서 살던 때. 그때 생각이 자주 난다. 할머니는 여러 개의 델몬트 유리병을 번갈아가며 뽀드뽀득 씻었고 고슬고슬 말렸다. 일주일에 한 번은 큰 주전자에 둥굴레, 보리, 옥수수를 가득 넣어 팔팔 끓였다. 수도꼭지를 미세하게 한두 방울씩만 나올 정도로 틀어놓은 수도 요금에 매겨지지 않을 공짜물을 마술처럼 고무 대야에 받아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주전자를 넣어 오래 천천히 물을 식혔다. 고소한 노란색 물이 담길 순서를 잠자코 기다리던 유리병들, 풍기던 고소한 냄새, 주전자 주변으로 따뜻해지기 시작하던 물의 온도.


나는 그렇게 고소한 물이 유리병에 담기는 과정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물이 담긴 유리병을 기울여 물을 따를 때마다 손에 바짝 힘을 주며 긴장하곤 했다. 내가 저지를 사고 중 가장 큰, 재앙 수준의 것 그 유리병을 깨뜨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일이 엊그제 같다.


할머니는 아파트에 화단에 방앗잎 씨를 뿌렸다. 무심코 자란 방아잎들을 수시로 뜯어 부침개를 해줬다. 언젠가 TV에서 방앗잎 건강에 좋다고 한 바람에 아파트 주민들이 할머니의 방앗잎을 공격했다. 잎과 줄기를 훑어가듯 가져가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급하게 뜯어가 다시는 잎을 만들지 못하는 방앗잎 줄기를 보며 속상해했다.


지난주 방앗잎 부침개가 먹고 싶어져 인터넷에서 방앗잎 씨앗을 주문했다. 배달 온 씨앗을 받아들고 아직 심지는 못하고 있다가 요양병원에 있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 뭐해?"

"나? 누워 있제. 누워있는 것이 일인디."

할머니는 고관절 골절로 몇 개월째 누워있어야 했다.

"할머니, 나 방앗잎 씨 샀어."

"오잉. 그랬냐잉. 집안에서 키우믄 겨울에도 키울 수 있제. 잘 키워가꼬 맛나게 부쳐서 먹어라잉. 잘 챙겨 먹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잉."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전화를 끊을 때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말한다. 나는 그게 싫어서 금방 보러 갈 듯 다음 만날 날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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