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뚝딱이 신입과 사수님
토공녀 - 토목직 공대 여자
나는 현장에 가자는 말에 당장 뛰쳐나오긴 했는데. 아직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자였다. 멀뚱히 밖에 나와 빈 벌판만 보고 있는데 단장이 "자네 운전은 할 줄 아나." 물었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사실 운전면허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나의 사수가 되실 분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선배님께서 나 대신 운전석에 올라 타셨다. 사파리를 구경 온 관광객처럼 엉거주춤 차에 올라탔다.
수능 시험을 보고 바로 운전면허부터 따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언젠가 운전이 필요할 때 따겠다는 고집을 부렸던 것을 후회했다. 막상 운전이 필요할 때는 운전면허 학원을 다닐 시간이 없을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제 막 소소하고 귀여운 첫 월급을 받았는데 그 돈을 운전면허 학원에 쓰기에는 학원비가 무척 비싸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어쨌든 나는 곧장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격주로 주말 근무를 해야 하는 날을 빼니 2주에 한 번씩 학원에 가야해 운전면허 취득이 더뎠다.
일은 막상 시작하고 보니 내가 월급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사수님이 건네주신 설계 도면을 공부하거나 업무 편람을 넘겨보고 컴퓨터를 켜서 결재 시스템을 구경하는 것들 뿐이었다. 오전에 출근하면 슬이 씨와 함께 탕비실을 정리하고 비어있는 커피통을 채워 넣는 등의 일을 했는데. 사실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무실보다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녹여 얼음에 섞어 선배들이 시원하게 마실 수 있게 냉장고에 채워 넣는 일이 더 마음 편했다.
탕비실에 계속 숨어있을 수는 없어 자리에 나와있으면 선배님들의 각종 심부름이 생겼다. 대부분 복사, 인덱스 붙이기, 도면 찾기 등 간단한 일이라 선배들도 부담없이 맡기셨는데. 복사기는 사실 도서관에서 한두 장 찾아 직접 복사해본 것 외에는 사용해본 적이 없었고, 인덱스 붙이기도 자꾸 삐뚤빼뚤 붙여져 마음같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에는 도면을 크게 보기 위해서 인쇄소 같은 곳에 있을 법한 대형 인쇄기까지 있어서 사용법을 선배에게 배우는데 자꾸 오작동이 나 겨드랑이 땀을 한바가지는 흘린 것 같다.
나는 사수님, 차장님, 단장님이 원하는 크기에 맞춰 인쇄기에 그 규격의 종이 롤을 끼워 넣어야 했다. 쓱싹쓱싹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와 싸악 하고 종이가 잘리는 소리 턱 하고 도면이 인쇄되어 잘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 인쇄기 앞에 가보면 이상한 크기의 도면이 찌그러지거나 잘려 나와있었다. 나중에는 하루 종일 그 인쇄기 앞에 서서 잘 복사되고 있나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도면이 잘못 나오면 종이를 몰래 구겨 버린 후 인쇄를 다시 설정했다. 그런데도 자주 실수를 하고 종이를 몰래 버리다가 선배에게 걸리는 경우가 있어 자주 난감했다.
사무실에서의 우당탕탕 심부름 실수를 하다가 가끔 사수님을 따라 현장에 나갈 일이 생길 때면 좋았다. 사수님은 흙먼지를 가르며 넓은 공터를 지나 현장을 가면 차를 멈추고 한 박자 쉬고 흙먼지가 나를 앞지른 후 문을 열어야 하는 것도 알려주셨고. 현장을 확인하러 나가기 전에 감리 봐야 하는 곳의 도면을 모두 숙지해서 나가야 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다.
사수님은 그밖에도 알려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알려 줄 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쁜 자신의 상황을 무척 난감해 하셨다. 본인도 이미 몇 달째 야근과 주말 근무를 연속해서 하고 계셨는데, 시간을 쪼개서 나를 멀끔한 사회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감사한 마음이 들어 사수님에게 더 잘 보이고 싶고 뭐든지 씩씩하게 잘 해내고 싶은데 그럴 수록 사수님 앞에서 더 뚝딱거리게 되었다.
사수님은 내가 "과장님. 감사합니다." 를 "과자님. 감사합니다."로 잘못 보낸 문자도 모른 척 해주셨고. 자동차 작동법에 익숙치 않아 조수석 문 옆에 서계시는데 와이퍼를 움직인다고 워셔액을 뿌리는 바람에 사수님의 옷에 파란물이 들어도 화내지 않으셨다. 운전 면허를 딴지 하루 밖에 되지 않은 나를 믿고 현장에 나가시다가 하천에 차가 빠질 뻔 했는데도 손잡이를 꽉 잡으실 뿐 소리 지르지 않으셨다.
사수님만 따라 다니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