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우리를 꾹 눌러주는 문진 같은 할머니
순자와 복덕
혜원이 7살이 되던 해, 온 가족이 함께 한집에 모여 살게 되었다. 순자는 시어머니 복덕과 다시 함께 살게 되었고, 순자는 그쯤부터 눈에 띄게 자주 화를 냈다.
식당에 딸린 방 안에서 혜원을 혼낼 때에도 마지막에는 꼭 안아주던 순자였는데. 더 이상 훈육 뒤에 혜원을 안아주지 않았다. 식당이 아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에는 더욱 자주 불같은 화를 냈고, 나중엔 혜원을 방으로 불러들여 빗자루로 때리며 울부짖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속상하게 하느냐고 순자가 소리치면 혜원은 양손을 한데 모아 힘껏 비비며 용서를 구했다. 방 안에서 오래 큰 소리가 날 때면 복덕은 문 앞까지 쫓아와 애를 왜 이렇게 잡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면 순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더 긴 훈육을 이어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순자와 복덕은 분명 서로에 대한 화풀이를 혜원에게 하는 것이었는데. 혜원은 순자와 복덕의 사이가 내내 좋지 않은 이유가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순자는 복덕의 흉보는 이야기를, 복덕은 순자의 흉보는 이야기를 혜원 앞에서 가감 없이 말했다. 이 둘은 혜원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믿는 듯했다. 혜원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복덕은 주로 집에, 순자는 주로 식당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이 두 여자가 종일 보내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다행이었고, 모두 혜원이 잘 알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더욱 다행이었다. 이들의 공간이 모두 혜원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탐색하고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무엇보다 컸다.
그들이 집과 식당이라는 공간에 각각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녀들에게 답답한 현실이었을지 모르지만, 혜원은 그 사실 덕분에 조금은 참을만했다. 복덕은 혜원이 아는 시장을 갔고, 혜원이 아는 교회 사람들을 만나고, 혜원이 아는 시장 상인들을 만나 물건을 샀다. 순자는 혜원이 아는 동선 내에 매일 머물며 익숙한 인쇄소 골목 상인을 상대로 밥과 고기를 팔았고, 혜원이 아는 순자의 친구들은 주로 제 발로 식당에 찾아와 수다를 떨고 돌아가곤 했다.
혜원은 순자가 없는 집에서, 복덕이 없는 식당에서 두 여자를 관찰했다. 두 여자는 매일같이 쉬지 않고 노동을 하며 수백 번의 상차림과 설거지를 반복했다. 그녀들이 각자 따로 시장을 가고 아는 이들을 만나 짧은 담소를 하고, 이웃과 함께 나물이나 도라지 등을 다듬을 때. 혜원은 순자와 복덕이 마주 보고 앉아 메추리알 껍질을 까며 이웃 누군가를 함께 험담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혜원이 8살이 되었던 해. 평소의 토요일처럼 복덕과 언니들을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간 날이었다. 복덕은 세 손주의 몸을 정성껏 씻기느라 지쳐 정작 본인의 몸은 대충 닦고 나왔다. 혜원의 언니들은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복덕은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며 목욕탕에서 만난 동네 할머니들과 근황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혜원은 복덕 옆에 앉아 동백 기름통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복덕은 본인이 최근 누구를 쫓아가 머리채를 잡고 혼쭐을 내줬다고 말했다. 아들 상영에게 다시는 꼬리 치지 못하게 단단히 단속을 하고 왔으니 며느리가 다시는 속상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혜원은 복덕을 올려다봤다. 입을 다부지게 앙 다물었다가는 금세 또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지난 며칠간의 활약에 대해 떠들고 있는 복덕이 낯설었다.
혜원은 오랜 시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젊은 시절 집을 떠나 멀리 부산에 터를 잡은 후 간간이 제사에만 성실하게 참여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일 년에 한두 번 돌아와 본인 조상의 제사만 챙기고 가는 할아버지에게 자주 화를 내며 소리치던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런 날이면 복덕은 모로 누워 한숨을 쉬며 늦은 저녁까지 잠을 들지 못했고. 혜원은 복덕 옆에서 자주 잠을 설쳤다. 내가 사랑하는 복덕을 울게 하는 할아버지와 내가 사랑하는 순자를 미치게 하는 상영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혜원은 궁금했다.
상영은 걱정될 정도로 너무 젊고 탱탱했기 때문에 혜원은 곧 울고 싶어 졌고, 경솔하게 말을 흘리는 복덕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복덕과 순자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게 얽혀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감이 들었다. 복덕은 그 누구보다 순자를 더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혜원의 부모는 너무 눈부셨기 때문에, 우리 옆에 있어주는 복덕이 문진처럼 묵직하고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