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자격지심은 걱정 인형을 낳는다
첫 발령
취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6년 동안 늘이고 늘여 대학을 다녔다. 막상 취업이 되고 보니 내가 면접에서 큰소리친 것처럼 '준비된 인재'가 맞는지 '이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일꾼'이 맞는지 본격적으로 걱정이 되었다. 잠시 보고 마는 면접과 매일 함께 생활하며 나의 민낯을 드러내야 하는 직장 생활은 해보진 않았지만 몹시 다를 것 같았다.
4년 하고 2년 동안 토목공학과를 다니면서 크고 작은 자격지심은 똘똘 뭉쳐 나에게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조교들과 선배들이 서로 형님, 동생 하며 함께 빈 강의실에서 담배를 태우거나, 학교 앞에서 매일 점심 저녁으로 함께 제육볶음을 먹는 곳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은 필기시험 정보나 실기 또는 취업 정보 또한 꽉 쥐고 서로에게만 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분과 인맥으로 많은 결정이 내려지는 지방대학교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쥐고 여학생들에게 그것을 내어놓지 않았다.
한 번은 기말고사 시험 시작을 앞둔 날이었다. 그날 도서관 4층 휴게실에 토목공학과 예비역 선배들이 잔뜩 모여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다른 여자 동기들은 족보라도 얻어볼까 기웃거리고 있었다. 매일 같은 수업을 듣고, 필기 노트를 나눠보던 예비역 오빠들이 히죽거리며 우리에게 운을 띄웠다. "힌트 알려줄까? 어느 챕터에서 나오는지 알면 그 부분만 외우면 돼." 시험 범위에 있는 책의 모든 내용을 외워야 시험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수문학 교수님의 시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와 친구들은 몇 번 분위기를 맞춰 콧소리를 냈고, 그들은 몇 가지 힌트를 주려고 했는데. 순간 현타가 왔다. 나는 휴게실 밖으로 나와 곧장 열람실로 들어갔고. 앉은자리에서 시험 범위의 모든 내용을 적어 내려가고 또 적어 내려갔다. 나는 모든 부분을 가리고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외워간 덕분에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모든 일에 이처럼 아득바득 최선을 다해야 남들만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언제까지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자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도 졸업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토목공학은 남자들에게 정보가 집중되어 있지만, 나도 노력하면 잘 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토목 기사를 필기 2번, 실기 3번을 떨어지면서 왜 익혀야 하는지 모르겠는 흙의 부피 같은 것을 덤프트럭으로 몇 번 옮기면 하루에 어느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따위를 구하면서도. 어쨌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가능한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발령을 받고 '바빠 죽겠는 현장에 여직원이 온다는 소식에 다들 사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들었을 때. 나는 이제 어떤 방식의 노력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내일은 첫 출근이다. 입고 갈 치마 정장과 구두를 확인하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바지와 운동화도 챙겨두었다. 트집 잡히고 싶지 않고, 뭐든 잘 해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다. 어쨌든 힘을 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