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Jul 22. 2019

첫 휴가

첫 휴가, 파리의 조선족


*** 첫 휴가, 파리의 조선족



 외인부대의 휴가는 첫 해, 3주부터 시작한다. 주말은 포함하지 않고 정확하게 휴가 일자를 포함하여 귀대날짜를 정해주고, 겨울 휴가까지 포함하여 년, 15일의(3주) 휴가를 받았다. 근속 년 수가 늘어날 수록 휴가 날짜도 일주일씩 늘어났다. 해외파병이나, 해외 기지 2년 근무 후, 프랑스 본토로 돌아오면 자대 배치를 받기 전까지 40일(2개월), 거의 2개월 휴가를 받았다. 


 파리로 향했다.

얘기치 않은 무릎 문제로 기분이 상했지만 우울함에 젖어 의기소침할 내가 아니었다. 외인부대 지원하기 위해 파리로 와서 휴가 나온 부대원들을 만났던 호텔로 향했다. 호텔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한국에서 음대 교수를 했다던 주인은 파리 외곽 뱅센느 숲 근처에서 꽤 큰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군 최저시급 월급으론 호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한국 음식점도 같이 운영해서 실용적이었으나 시내와 동떨어졌기 때문에, 시내를 돌아다니다 만난 베낭 여행객들이 준 정보로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민박집에 머물기로 하고 자리를 옮겼다.


 민박집은 파리 3구, 퐁피두 센터 근처에 막 생성되기 시작한 차이나 타운에, 그것도 길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운영했지만 알고 보니 동업을 한다고 했다. 서른 인생을 통털어 파리에서 조선족을 처음 만났고 그들의 순박한 모습이 마치 시골 고향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 즐겁게 어울렸다. 주인 남자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사람 좋은 모습으로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여자는 마치 간이라도 빼먹을 듯 매력 넘치는 즐거움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살면서 만날 수 있는 천사들을 본 듯, 혼을 쏙 빼놓을 듯한 친절한 즐거움으로 나의 휴가는 우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베낭여행을 온 여행객들과 어울려 날마다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이 서른,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프랑스 군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내게, 한국의 젊은 여행자들과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문화 유적지를 다니며 느끼는 문화의 충격은 이루 말할수 없을만큼 컸다. 프랑스 군대에서 군대 시스템을 익히며 프랑스어를 배우기에도 부족한 내게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 그 곳에 살았던 여러 왕들과 야사들은 문명에 무지했던 내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조금씩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적인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계절의 여왕 5월의 하늘은 너무나 청명했고 겨우내 숨죽였던 대지가 깨어나면서 피어난 꽃들이 꽃잎을 틔우고 화려한 기지개를 폈다. 스무 여덟 해, 한국을 떠나오면서 미래에 대해 암울했던 심정은, 파리에서 새로 탄생한듯 내 인생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이 맞는 민박 투숙객들과 여행을 하는 와중에 조선족 형님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고 장소로 나가보니 뱅센느 숲이 우거진 1호선 종점, 뱅센느 성 역이었다. 전화상으로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조선족 동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터였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내가 해야 하는 지는 몰랐다. 늦게 나타난 초췌한 모습의 어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내게 얼마간의 돈과 비닐봉지에 담긴 구두 한 켤레를 내밀었다.



뱅센느 숲의 도메닐 호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좀 전해주세요. 그이가 술을 마셨는데, 주인의 신고로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들통나서......"


 그분들이 건네 준 물건을 가지고 경찰학교의 불법체류자들의 수용소까지 처음 가는 그 길은 꽤 먼 거리였다. 같은 처지의 조선족 동포들은 같이 갈수가 없으니 버스정류소에 남았고 나는 처음 와본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벵센느 숲은 너무 넓었다. 처음 와본 곳에서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경마장으로 가는 길엔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파리 한인회에서 축구와 체육 친목회를 하는 뱅센느 숲 운동장을 지나고 경륜장으로 가는 길은 내게, 너무나 가슴 설레는 길이었다. 나는 불법체류자라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지만 어감상 좋지 않다는 것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심부름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기쁨과 안스러운 기분이 교차했지만 동료의 도움을 간절하게 원할 사람에게 나의 방문은 기쁠 것이라 믿었다. 사정이야 알았으나 이까짓 발걸음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텐데, 천 유로의 돈과 구두 한 켤레를 전해주기 위해 생전 알지도 못하는 내게까지 전화를 해야 했을 이분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그들의 근심에 비하면 먼 길도 아니었다.


 앞서 부지런히 걸어가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유모차를 끌면서 작은 키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분주했다. 어디를 저렇게 바삐 가는 것일까...... 한동안 걸어도 불법체류자들이 거주할 만한 수용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이 사라진 거리를 따라 경마장까지 갔을 때, 비로소 그녀도 수용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가는 곳이 수용소였던 것이다.


 경찰은 그녀의 여권과 나의 군인 신분증을 확인하고 면회가 가능한 접견지역까지 안내했다. 대부분의 이러한 수용소는 군, 경이 맡고 있어서 그 구조와 시스템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찾아온 낯선 나와의 만남을 위해 촌각을 다투는 답답한 순간을 이 시간에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기다리는 시간에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여자는 우크라이나 인이었고 그녀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위해 익숙한 손길로 목도리를 두를 때나 장갑을 벗길 때나 아이의 볼을 쓰다듬을 때, 어머니라면 마땅히 저러한 눈길과 손길을 가져야하는 것이겠지, 저렇게 헤어져야만 하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이 먼 길을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겠지…… 여인은 벙어리였다.


"아이고! 이렇게 찾아 주셔서 무어라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자유와 꿈을 잃어 낙심해 있을 남자는 농부처럼 주름이 깊었다. 씻지도 닦지도 못해 남루한 모습의 그가 조카뻘인 내게 '선생님'이라 불렀다. 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에서 구제해주지도 못할 주제에 로부터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으니 민망했다.


"돌아가시거든 동지들에게 일러주십시오. 내가 친구들은 참으로 잘못 사귀지 않았구나. 이 먼 곳까지 친구를 위해 어려운 걸음을 마다하지 않으니 과연 이 정 영철이가 나쁘게 세상을 살지는 않았구나, 나가시거든 꼭 전해주십시오. 선생님!"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눈가에 고인 눈물이 애절했을까?
 내가 3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알 수 없는 무릎 문제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위해 수고해준 한국인은 단 세 명에 불과했었다. 나머지는 뒤에서 욕하고 나이와 인간관계를 떠나 비난과 손가락질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들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는 그의 인간관계가 부러웠다. 술 마시고 객기를 부렸음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추방당해야 하는 그를 위해 위로해주는 친구들로 인해 그의 마음은 따뜻할 것이고 술 때문에 망쳐버린 그의 인생에 경종을 울릴 것이 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나를 위해 수고해줄 사람 몇 명일지 알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미약한 내 힘이라도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저 어른은 얼마나 절망하며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는 길에, 여인은 다정한 웃음으로 아이의 유모차를 끌어주어 고맙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조선족 어른들도 추위에도 꼼짝 않고 정류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그 아무렇지 않은 내 수고에도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 표시를 했다. 그들의 모습에 행여, 진정 중요한 인간성이라는 것을 잃어 가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며 모두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 저들이 동료들과 합류하면 작은 케익 하나도 만찬이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세상이 다 자신의 것인 것을, 행여 모두를 사랑한다는 관용으로, 혹은 착한 마음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겸허함으로 그들은 내게 후한 저녁을 대접했다.



루브르 박물관의 루이 14세 동상과 피라미드 입구의 한국인 여행객들과


 5월인데도 파리를 찾은 젊은 여행객들이 그 민박집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혼숙으로 머물렀기 때문에 마치 캠핑 온 듯 오손도손 재미가 있었다. 젊고 발랄한 여행객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게 발랄한 생기를 불어넣었고, 프랑스 문화 탐방이라는 맛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무엇인가를 잊고 사는 내게 지식이라는 갈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 갈증을 느끼며 사령부로 돌아왔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못했던 탓에 체력도 엄청 떨어져 있었고 긴장도 많이 풀려 있었다. 낯설었던 환경이 눈에 익고 시스템이 조금씩 몸에 베이긴 했지만 아직 자대배치를 받지 못한 신병의 개인행동과 자유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대는 명확하게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믿고 맡기는 모양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알프스 몽블랑 도전기 1, 샤모니 몽블랑을 향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