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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ug 05. 2020

친구가 기억하는 파리에서의 기억

고향 친구가 파리에 왔다.



"내 인생에 네 덕분에 파리에 가본 게 최고의 행복이었어! 근데 왜 몽생미셸은 구경시켜 주지 않았던 거야?"


 친구가 나를 만날 때면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하던 얘기였다. 

외인부대를 제대하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이 파리 퐁피두 광장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일이었다. 세계에서 온 어린 학생들에서부터 여행객들까지, 퐁피두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즐겼던 시간 덕분에, 남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 보금자리를 만드는 목표를 향해 고군분투할 때, 나는 파리 퐁피두 광장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구속받지 않는 생활을 즐겼다. 그 광장의 기억은 늙어도 그런 일로 소일하면서 세상 사람들 만나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홀한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막 프랑스에 도착한 듯 한 젊고 싹싹한 한국인 가이드가 퐁피두 광장 앞, 마로니에 가로수가 아름다운 포부르그 거리를 몇몇 손님들과 다니며 파리 곳곳을 설명하는 모습에, 프랑스 역사를 5년이나 산 나보다 많이 아는 것에 충격을 받아 그를 따라 가이드가 되었다. 가이드 생활은 내게 또 다른 신천지를 보여주었는데, 여름 방학이면 유럽 여행을 2, 3개월 일정으로 오는 학생들의 재기 발랄함과 부지런함, 지식에 대한 갈망, 총명함과 예의까지 갖춘 모습에 넋이 나갈 정도로 매료되었던 데다, 루브르 박물관부터 시작된 예술, 종교사, 건축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세상 참 헛살았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연한 기회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게 되면서 나는 가이드를 하고 요리를 할 사람으로 조선족을 구했는데, 내가 없는 사이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해서 해고한 뒤로 요리사가 직업이던 고향 친구를 파리로 불렀다. 여름 방학이라 너무 바쁠 때였다. 여행사 가이드는 거의 매일 루브르 박물관과 파리 시내와 베르사유 궁전을 다니면서 바쁠 때였다. 전철역에서 꽤 먼데도 게스트하우스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뤄, 한 사람이 집 관리를 하기에 부족할 텐데도 친구는 척척 너무 완벽하게 그 일들을 해냈다. 심지어 올곧고 정감 가는 이웃 아재 미소와 해학도 넘쳐 모두들 '달수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다. 


 가이드 일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에 오는 아이들에게도 무료 가이드 투어를 시키고 일본 관광객을 유치하려 일본어가 되는 고향 동생을 불러 아침, 저녁으로 우리 집은 난리난리 그런 난리도 아니었을 정도였다.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 같은 미남형에 사근사근한 성격이라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면서도, 파리라는 자유분방한 다인종 도시에서 멋쟁이 유러피언들과의 접촉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하게 고지식한 부분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유학까지 한 동생은 파리에서 가이드를 할 만한 마인드를 소유하지 못했고 중간중간 업무 체크도 이해하지 못해 방해가 되고 있었다.


프랑소와 1세에 의해 세워진 루브르와 카뜨린느 드 메디치가 지은 튈르리 궁전을 좌우로 나폴레옹 광장을 자나 유리 피라미드를 만난다


파리에서 최애 하는 음식 베트남 쌀국수. 한국에서 먹었다가 실망해서 아예 먹지 않는다.

 나는 친구와 동생에게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시켜 주고  오르세 미술관과 베르사유 궁전, 중국인 노래방, 파리 유학생들이 IMF가 왔을 때, 눈물을 머금고 먹었다는 베트남 쌀 국숫집, 루브르 박물관의 일본 라멘집, 유명 한식집 등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요리를 맛보게 했다. 또한 밤의 화려한 조명의 도시 파리를 보면서 2006년 여름을 뜨겁게 보냈다. 그러나 나는 친구가 요리하면서 슥슥 만들어내는 배추 이파리와 된장, 먹음직스러운 고추와 오이 무침 같은 요리를 더 좋아했다. 


 우리는 여름 3개월을 그렇게 뜨겁게 보내고 헤어진 지 15년 만에 창원 상남동에서 만났다. 그 뜨거운 여름, 손님으로 왔었던 학생이 주인이 되어 운영하는 레스토랑 곰에서 아직도 요리사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우리는 15년 전의 추억에 빠졌다. 그러면서 친구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왜 몽생미셸을 구경시켜 주지 않았어? 다시 가자 파리!"


 당시, 몽생미셸을 일주일에 최소 두세 번은 다녔었다. 기억을 해봐도 왜 친구를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쓰다 보니 이유를 알아버렸다. 몽생미셸까지는 370km, 편도로 4시간이 걸리고 구경하는데도 네댓 시간, 돌아오면 운전으로 피곤함이 장난 아니었다. 손님들 미팅 장소인 생미셸 광장이나 호텔 등에서 출발하려면 아침 6시까지는 픽업을 해야 했다. 대신에 게스트하우스는 아침 8시가 식사시간이니 한 번도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 


"나중에 시간 내서 몽생미셸도 보고 거기보다 더 좋은 생말로도 가자~"


 가만 생각해보니 친구에게 받은 것에 비해,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최근 이혼을 하고 쓸쓸한 친구에게 몽골 프로젝트의 주방장이나 알제리 프로젝트로 불러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국 여자의 수준 높은 교육열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러, 웬만한 한국 남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으니 친구나 나나, 아직 순박한 시골의 모습과 남편에게 충성할 다른 나라 여성을 찾아보자고 므흣한 농담을 나누었다. 


 곰 레스토랑을 하는 동생과 친구는 내 기억에 분명히 파리에서 만난 사이일 텐데도, 먼저번에 만날 때는 서로 기억하지 못했고 이번에도 서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그때가 2006년 여름이란 얘기를 듣고 확인하더니 곰 동생이 떠나기 마지막 날,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면서 만났던 것을 상기해 냈다. 내 기억 속에 둘은 밤늦도록 죽이 맞아 형님, 동생 했던 흐뭇한 기억이 있었다. 곰 동생은 그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 데다 , 다음 날 귀국해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고 친구는 원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기억하지 못했는데, 토요일 저녁마다 삼겹살과 맥주 무한리필로 돈 벌기를 포기한 집으로 소문이 났던 집이기도 했다. 


"너 파리 처음 왔을 때 기억나? 샤이요 궁전 앞에서 에펠 탑 구경하고 투어 마치고 집에 가다 보니 네가 없어져서 부랴부랴 너 찾으러 다시 갔던 거? 전화도 없지, 처음 파리 도착한 놈이 어디로 샜나 쌩 난리 불르스를 추다가 샤이요 궁에 가니 가만히 앉아서 배시시 웃던 거 기억나? ㅋㅋ 야, 아무리 에펠탑이 좋아도 그렇지! 황혼이 지는 에펠 탑을 턱 괴고 집 나온 애처럼 아무 걱정 없이 보던 네 모습 말야!"


 친구는 배시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커피 마실 때 말이야, 웬 조그만 여자애들이 와서 정신없게 만드는데 내가 보니까 딱 소매치기 같은 거야! 루브르 박물관 팜플랫으로 사람들 시야를 가리면서 돈을 구걸하는데 밑으로는 휴대폰이나 지갑을 훔쳐가려는 수법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네가 걔들을 세게 밀어 넘어뜨린 거지! 여러 번 그러던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알 수 있었어? 여행객들은 얘기한다고 정신없어 보여 딱 소매치기당하기 십상이던데! 넌 웃으면서 그러더라!"


"그것도 그건데, 몽마르뜨 언덕 올라갈 때 흑형들 엄청 많잖아요! 무섭게 다가와서 손가락에 행운의 실이라면서 끼워주고 돈 안 주면 협박하는 애들이었는데, 맨 마지막에 따라 올라가던 여자애가 잡혀서 인원 통제가 안되는데 형님이 오더니 그 흑형과 얘기하는데 갑자기 주변 흑형들이 다 모여들어 우리를 에워쌌잖습니까? 우리는 무서워서 어쩌나 싶은데 형님은 잠깐 얘기하더니 웃으면서 애들 다 데리고 올라갔는데, 그때 무슨 얘기한 겁니까?"


"아, 그런 일이 하도 많아서 한 번 얘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딱 한 번 걔들이 우리 애들 건드렸지. 흑형들이 외모는 우락부락해도 심성이 착해.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렇지 남들 해코질 거의 안 하는 애들이라 좋게 얘기했지. 내가 아프리카 파병도 다녀보니 아프리카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에 와서 정당하게 일할 생각 않고 여행객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너희들 보면서 실망하게 해서야 쓰겠냐. 정당하게 일해라! 여기서 문제 만들고 싶으면 너네 대장 델꾸 와! 한 판 붙어주께, 외인부대원의 이름으로! 그랬지! 그 후론 볼 때마다 인사하고 우리 식구들은 안 건드렸어! 대신 아랍계 소매치기는 가만 두면 안돼! 답이 없는 애들이라 필사적으로 싸워야 될 정도로 위험한 놈들이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몽마르뜨 언덕의 흑형들. 경찰들이 닥치면 추격전이 시작되고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재미를 안긴다.



"그리고 밤에, 차 타고 나가서 분수대마다 다니면서 물놀이하고 다니는데 얌전한 애들도 막 다 따라 하고, 여튼 파리에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형님 집에서는 참 특별했던 거 같애요! 집도 전철에서 꽤 멀었던 거 같은데 불편해도 감수하고 진짜 열심히 다녔고!"


"그런 거야 뭐, 다른 집도 다 만원이고, 젊어 유럽 본토에 왔는데 역사책이나 미술책에서 본 것들 직접 보니 얼마나 좋겠어! 그건 당연한 거야! 난 애들이 돈 아끼고 시간 아껴 그렇게 악착같이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려는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더라!"


"그랬지. 나야 뭐, 맨날 요리만 하고 살았는데 학생들 그렇게 많이 만나 얘기 나눠보니 정말 우리나라 미래가 밝다 싶더라. 어찌 그리들 건강한지! 너도 돈 안 따지고 애들 소매치기당해서 경찰서 다니면서 조서 꾸며주고 뒤치다꺼리 다 해주면서도 맨날 허허실실 웃으면서 다녔잖아! 


"엥? 난 완전 짜증쟁이에 게을러터졌는데?"


"글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안 그렇더라니까! 너한테 딱 맞는 직업이었달까, 다시 파리 돌아가거든 좀 더 크게 해서 날 주방장으로 채용하고 몽생미셸 데려다줘!"


 친구가 익살을 떨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소소한 얘기들을 시작했다. 그 얘기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닌, 서로의 장단점을 상호보완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멋지고 희망적인 우리의 모습이었다.


"네가 몽생미셸 가려고 별의별 아부를 다하네~! 일단 프랑스 가기 전에 외국에서 돈 좀 벌고 장가도 가고 응? 글고 나서 파리 가서 살자~"


 곰 레스토랑 동생은 유럽여행에서 이탈리안 식 레스토랑을 운영하기 위해 요리를 배우는 것은 물론, 손님 접대까지 맞추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했다. 과연 초창기에 왔을 때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다음에 왔을 때는 고깃집을 운영했다가 다시 오픈했다고 했다. 


"벌써 15년 지났네 우리 만난 지가! 넌, 이 정도 경력이면 상남동 레스토랑계를 평정할 정도로 성장한 거야?"


"참 내, 형님도! 한국인들 근면 성실과 성공에 대한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시나부네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날고 기는 사람들 수두룩하고 그렇게 노력해도 자본가들에게는 상대도 안됩니다. 웬만한 식당들 잘 나가도 뻔한 수입이라 고만고만하고요, 한참 멀었으니 더더욱 노력해야지요. 진짜 하고 싶은 건 캠핑인데, 이것도 발 들여놓으니 빼기도 힘드네요. 코로나가 와서 하루하루가 전쟁입니다."


 모두들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잊고 살던 파리의 생활을 소환하며 프랑스가 왜 코로나 사태에도 무방비로 당했는지,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한국의 대처를 칭찬하며 마크롱을 비난하는 프랑스 친구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괜한 자부심이 생겼다.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축물이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간직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첨단 산업마저도 최고를 자랑하는데 한국의 조선소에 와서 컨소시엄으로 같이 일하긴 해도 그들이 가진 원천기술마저도 세계 최고라도 그들이 우리를 우습게 여겼던 오만함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그나마 인식의 변화를 주었다. 


 그 프랑스 친구들이 말했다.


[한국이 한참 후진국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즐기는 사이 한국이 우리 옆을 지나가면서 '안녕?'하고 추월하는 것 같아!]


 허나, 그들의 그런 칭찬이 겉치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아직 한국이 일본의 기술에 미치지 못하며 조선과 항공의 핵심 기술에 미치지 못하니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로도 보였다. 세계를 주유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니 겸손의 미덕이 최고더라!


Actemium과  GTT, Total 친구들.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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