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
얼마 동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는지 몰랐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니 돌아가기가 까마득했다. 앞으로는 아직 목적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스틱으로 휘저은 조그만 구멍은 점점 커져 발 밑에 거의 이르렀고 저편으론 시커먼 구멍이 아가리를 벌렸는데, 그 넓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후들거렸다. 속절없이 흐르는 식은땀과 전율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습게 여기고 혼자 오겠다던 오만함은 이미 저 구덩이 깊숙이 사라졌다.
가만 생각하니 드 넓은 설원에서 꼼짝 않고 가만히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 있는 꼴이 우스웠다. 우회로를 찾아야 했지만 분명 눈 속에 덮여 앞을 가로막고 있을 크레바스 방향이 어디까지, 어떻게 뻗어 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삐에르가 조난당할 거라던 비웃음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나타나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제야 외인부대에서 받았던 훈련은 교관의 보호와 동료들의 든든한 지원 하에 이뤄진 초보 수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내 앞에 닥친 이 난관이 고맙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알프스 산맥을 혼자 등반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또한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란 깨달음에 이르자, 혼자 온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여행을 할 때,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해박한 지식에 매료되는 여행보다, 혼자 좌충우돌하는 것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인 것처럼,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앞두고도 서서히 두려움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뛰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배낭을 벗어 로프로 묶어 20여 미터 가량 던져 내 몸에 묶었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입에 침이 마르고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이윽고 피켈을 양손에 쥐고 힘껏 달려 몸을 날려 눈 속에 힘껏 꽃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배낭을 회수하며 시커멓게 보이는 크레바스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고 한심하며 다행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저 속에 빠졌더라면......
다시 목적지를 향해 올라가자 드넓은 설원이 나타났고 에귀드미디 전망대가 손에 잡힐 듯 눈 앞에 나타났다. 배낭을 깔고 앉아 쏘시송을 꺼내어 마늘을 얇게 썰어 끼니를 때우며 코스믹 대피소에서 잘 계획에 좀 전의 위험은 까마득하게 잊었다. 허기지고 체력도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넋을 놓고 한참을 에귀드미디와 코스믹 대피소를 번갈아 보는 풍경에, 에귀드미디에서 이탈리아 쿠르마이어로 향하는 파노라믹 몽블랑 케이블카가 유유히 설원 위를 가로질렀다. 5km 길이로 50분간 이동하는 이 케이블 카는 마터호른에서 탔던 느낌과 비슷해 보였다.
융프라우는 기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여행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유럽 여행객들 동선에 융프라우가 포함되었지만 기차를 타고 절벽을 곡예하듯 운행하는 짜릿함에 비해, 전망대에서의 그 단조로움은 마터호른에서 케이블 카를 타고 보는 설원보다 못했던 기억이 났다. 단지 융프라우는 올라가면 컵라면을 줄만큼 한국인들에게 유명했는데 동선까지 좋은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프랑스에서 뮌헨의 백조의 성을 보고 스위스로 와서 이탈리아를 가거나,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샤모니는 일반 대중들에겐 잘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대신 샤모니로 왔다가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배낭 여행객 루트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복을 해야 하는 두 곳의 알프스 관광지에 비해 샤모니는 이탈리아로 편도로 넘어갈 수 있으니, 베낭 여행객들에겐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여행사를 했던 경험이 죽음을 넘긴 짬을 이용해 여유를 부리는 내 앞으로 기럭지가 긴 커플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오후 네 시였다.
시계를 보며 긴 기럭지들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며 여유 있게 쏘시송을 마저 먹고 커피도 한 잔 끓여 마시자, 그들은 벌써 에귀드미디 전망대를 오르고 있었다. 30분, 그들이 그곳에 도착한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 느긋하게 일어서서 느린 걸음으로 설원을 걷자, 가까웠던 전망대는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산 정상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지만 다 왔다는 안도감에 해가 지고 있다는 불안감도 없이, 이 높이에선 고산병이 시작된다는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산이니 힘들다고 느끼면서 서서히 걸어가는 설원이 즐거웠다.
30분 걸려 올라갔던 기럭지 긴 커플을 보며, 내가 나이 먹고 운동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들처럼 넉넉하게 1시간이면 도착할 거라 예상했던 오만은 또 한 번 깨졌다. 그들 때문에, 코스믹 산장으로 가서 잘 거라던 계획도 무산되어 그들이 들어갔던 뒤를 따라 올라가니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전망대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마지막으로 문을 잠그던 남자 직원이 바삐 전망대 문을 잠갔다. 저녁 7시였다.
마지막 남아 있던 직원이 전망대에 숙소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혼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덕분에 아무도 없는 전망대 전 구역을 마음대로 누볐다. 우선 가장 따뜻한 곳에 침낭을 깔고 화장실에서 수건에 물을 적셔 간단하게 샤워도 끝내고 마음 넉넉하게 젖은 옷을 갈아입고 전망대 위로 올라갔다. 아직 해가 남아 있어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말을 잃었다. 산정은 황혼에 물들어 황금색으로 빛났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는 샤모니는 하나 둘 불을 밝혔다. 그 모습이 너무 깨끗하고 맑아 손 내밀면 닿을 듯해 죽을 고생 하며 걸어 올라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어둠이 내려 하늘의 별들이 반짝일 때까지 한동안 그 희열을 느꼈다.
얼마나 잤을까, 침낭 속에서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일생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두통에 숨이 턱턱 막혔다. 뿐만 아니라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하나둘씩 옷을 벗고 시원한 바닥에 몸을 식혔는데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고작 새벽 1시를 넘겼는데 이런 고통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고통은 점점 더해 극심해졌고 옷을 입고 일어나 앉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려 했지만 이런 대책 없는 고통을 경험한 기억이 없었다. 그것이 고산병이란 것을 늦게 알았지만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으므로 아침까지 고스란히 고통을 견뎌야 했다.
적당한 높이의 만년설로 뒤 덮인 몽블랑은 누구나 쉽게 넘볼 만큼 가까워 만만해 보였고 언제나 하얀 눈은 눈사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러나, 눈사태는 샤모니에 사는 사람들도 자주 목격하는 광경이 장관이었지만 그 속에선 멋모르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따라서 눈사태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을 ‘고산 등반 안내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용기는, 전문 정보 없이 고산지대를 등반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고작 4천 미터도 되지 않는 고지에서 느끼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만으로 할 수 없는 등산에 자신감을 잃고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도착하자 커피 한잔을 마신 뒤 첫 케이블을 타고 하산했다. 혼자 이렇게 가다간 정말 죽을 것 같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야, 그래도 살아 돌아왔네! 우리는 한국인 실종이나 변사체 발견할 거라고 내기했는데!"
알펜로즈 조 사장과 주방장은 귀한 손님에게 준다는 술을 꺼내놓으며 생환을 축하해줬다. 앞으로 고산지대 산행에 까불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틀을 몽블랑 건너편, 만만해 보이는 브레방에 올라보기로 했다.
고산증세는 샤모니에 내려오자 말끔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