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Aug 11. 2020

알프스 몽블랑 도전기 7, 샤모니 몽블랑

실수를 통한 경험



*** 르 부에(Le Buet) - Le Brévent 코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반대편을 마지막으로 올라보기로 했다. 너무 이른 아침에 내려온 탓에, 참고 몽블랑을 포기한 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산행은 해보자는 욕심이 아침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오후에 올라갈 계획이었다. 이번엔 르 부에(Le Buet)로 이동한 뒤에 브레방 호수로 내려오는 2박 3일 코스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 트레킹 코스는 몽블랑 트레커들이 11박 12일 코스로 즐겨 찾는 유명한 코스여서 따로 기본 몽블랑 투어인 7박 8일보다 긴 GTMB(Grand Tour de Mont Blanc:몽블랑 대 투어; 168km)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몽블랑 대 투어는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알프스의 장관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얼음이 녹은 그 길은 온갖 꽃들이 등산객들을 반겼고 찬란한 태양은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어울려 등산객들에게 각광받는 곳이기도 했다. 그 산행은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서 돌아와 자연스럽게 알프스가 갈라놓은 세 나라의 언어와 문화 차이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얼음이 녹는 4월이고 두 번의 사투와 고산병까지 경험하고 보니, 이제 그런 개고생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보통 2.5백 미터에서 높아야 3천 미터에 이르는 알맞은 등산코스를 골랐으니 지난 고생을 잊게 해 줄 것 같았다.


 마침, 알펜로즈의 두 분은 아직 도전을 포기하지 않은 나의 도전 정신을 높이 샀다. 새로운 루트를 알려주고 용기를 북돋웠다. 아침을 먹고 한 숨 잠을 청한 뒤 오후에 일어나 다시 밥을 먹고 르 부에까지 가는 기차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구름이 높은 산 정상들을 가린 흐린 날씨에 산에서는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샤모니에 대부분 내린 승객 덕분에 부에까지 가는 기차역과 기차는 한산했다. 안개에 가린 마을들을 지나 종착역인 부에에 도착하니 조그맣고 조용한 산골 마을은 벌써 밤이 되었는지 어두웠다. 가야 할 산길을 올려다보자 정상 쪽엔 구름이 잔뜩 낀 모양이 왠지 불길했다. 


 며칠간의 고생 덕분에 쫄보가 되었다고 생각하곤 피식 웃었다. 


르부에에서 올라가기 위해 역에 내렸는데 구름 잔뜩 낀 산엔 아직 눈이 녹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브레방으로 향하는 꼭대기 산들은 눈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2천 미터 이상 고지라도 눈이 내린다면 초행길에 길 찾기가 여간 곤란한 것을 알기에 덜컥 겁이 났다.



  마지막 산행을 위한 여정은 완벽했다.

 두 번이나 개고생을 한 이후라도 이번엔 안전한 등산로를 택한 덕에 발걸음도 자신감이 흘렀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라 더욱 뜻깊은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야 눈이 오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라 안개가 끼든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번의 경험은 쫄보로 만들기도 했지만 웬만한 건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도 했으니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감이 넘쳐 객기로 보이거나 오만함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했다.


 배낭엔 와인과 안주거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마트에 들러 샌드위치와 군것질거리를 좀 사고 괜히 여유를 부린다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느리게 빈둥거리듯 산길로 접어들어 올라가던 길이었다. 배낭을 멘 두 여자가 언뜻 보기에도 산책하듯이 등산복장도 아닌데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며 앞장서서 오르고 있었다. 늦은 오후 5시가 가까웠다. 그들은 이 시간에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일까? 4월의 해는 8시가 넘어서도 존재했지만 산악지대 해가 일찍 졌다. 숲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이 시간에도 산행을 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산책이라기에 너무 멋져 보였다.


 신기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지나치려 할 때 배낭을 힐끗 보고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 속엔 인형 같은 아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라 산뜻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파리 시내를 쫄바지를 입은 여자가 남편과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아기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지만 직접 보았을 때의 충격처럼, 그녀들을 신선한 충격으로 바라보며 사진 촬영을 요구했다. 흔쾌히 승낙한 그녀들, 몇 살이나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40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녀들은 사실, 유럽녀들은 피부 노화가 장난 아니게 빨라 30세가 되면 우리나라의 40~50대로 보아도 모자라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리고 결혼을 늦게하는 유럽인들의 특성상 30대 후반 정도 됐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이들을 위한 배낭까지 챙긴 걸 보니 필히 산악회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그런 남편을 두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들었지만 괜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이 아이를 배낭에 메고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마을 주변에 산책을 할만한 충분한 공원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음에도 우리나라와 같지 않은, 같아질 수 없는 이들만의, 어쩌면 이곳만의 색깔이랄까.... 산책하듯 몽땅베르를 오르던 빵 만드는 젊은이와 처녀의 모습에서 느끼는 것이 여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모니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고 간섭하지 않았다. 주민과 관광객을 옷과 얼굴로 구분할 수 없고 일하는 사람들과 관광객 또한 구분할 수 없어 신분과 직업 또한 구분할 수 없었다. 도시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고 변두리는 지천으로 핀 야생화에도 정원처럼 잘 조성되어 깔끔해 보였다. 이러한 조화로움이 한국의 여느 관광지, 욕망의 네온사인과 바가지요금과 자연스럽게 비교되었다. 


배낭을 메고 등산하는 두 여인
알고 보니 애기 배낭이었다.


 

 숲에는 벌써 봄이 온 듯 훈훈했다. 이 길만 지나가면 눈 덮인 능선이 나올 거라는 생각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지난 경험을 통해 어떤 장비가 유용하게 어떤 상황에서 쓰인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니 교육을 받을 때보다 확실하게 각인됐으므로 오늘은 어느 정도 길을 가다가 어두워지면 비박을 할 예정이었다. 산 허리부터는 눈이 날리는 모양인데 그런 눈 속에 자는 것도 오랜만에 추억 삼아 청승을 떨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파리에서 너무 바빠 정신없이 보냈던 터라,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를 테니 실컷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다.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눈길이 시작됐다. 

눈보라도 제법 몰아쳐서 봄날 같던 숲 속의 날씨와는 딴판이었다. 서서히 달아올라 땀으로 흠뻑 젖어 무덥던 몸이 시원한 눈보라에 신선함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새 길은 없어지고 눈이 나타났다. 또 길을 잘못 들면 개고생을 해야 할 생각에 이번엔 나침반을 사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루트는 정해져 있었고 높은 산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감각적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중요한 건, 아직 등산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발자국 찾기가 힘들었고 한 번 놓치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기 때문에 지형지물에 만반을 기했다. 그렇게 올라가는 길은 순탄하게 처음 목적했던 '하얀 호수'까지 이르렀을 때는 저녁 8시였다. 시간 맞춰 온 것이 대견했다. 지난 고생으로 체력이 많이 붙은 듯, 자신감도 함께 붙었다. 


  하얀 호수 대피소에 들어가자 눈보라가 훅 밀고 들어왔다. 등반객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혼자 텐트를 치고 자려던 수고를 덜었지만 간간히 적당한 거리에 마련된 대피소엔 사람들이 거의 사용한 흔적이 없이 깨끗했다. 관리인도 없는데 한 번씩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자신 것만 사용하고 알아서 치우고 가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뒷자리엔 쓰레기를 본 적이 없었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란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성숙함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프로의식이 느껴졌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만큼 강인함 속에 순박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대피소의 이불을 꺼내 깔고 덮고 배게까지 만들어 놓고 깊어지는 밤, 문을 할퀴고 지나가는 앙칼진 눈보라 속에 와인과 쏘시송으로 혼자만의 만찬을 즐겼다.


 세상 내 것인 양 드르렁드르렁 잠이 들었다.


산속 깊은 곳의 집이라도 허접해 보이는 집이 없고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함에 마음이 힐링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모든 것이 그림이다.



 파란 새벽,

화장실을 가려 밖으로 나가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잠이 확 달아났지만 다시 들어와 잠을 청했다. 시간을 보니 새벽 네시, 일찍 잤던 터라 그만 자기로 하고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날씨도 썩 나쁘지 않았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마시고 몸을 덥힌 다음, 움직이면 땀이 날 것이라 옷은 간편하게 입었다. 바람 없이 산 정상엔 구름이 껴 있을 뿐, 기분이 상쾌했다. 체력이 좋아졌다고 느낄수록 그동안 파리에서 편안했던 묵은 떼가 시원하게 씻기는 것처럼 상큼했다.   


 어제 내린 눈으로 눈 앞의 세상은 오롯이 내 발자국이 남는다는 설레임에 설피를 신고가는 발길에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2천 미터 이상의 고도엔 나무가 자라지 않고 브레방 쪽에는 가장 높은 곳이 3천 미터인데 곳곳에 스키장이 설치되어 있어 눈 속에 길이 덮였어도 대략 눈대중으로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길을 잃기가 십상이었지만 다행히 고도가 내려갈수록 어느 정도 눈이 녹아 길이 보였다. 그러나 길 위의 눈은 뚜렷하게 보이는 등산로 위에 둥그렇게 녹아, 홈이 진 경사로 틈 사이로 설피인데도 허리만큼 눈 속에 빠졌다. 


경사가 원체 심한 등산로였기 때문에 길 위이긴 해도 아이젠은 기본으로 엉덩이까지 발이 빠졌다. 때문에 설피를 신어도 눈이 녹는 시기라 살짝 위쪽이 얼려진 곳에 발이 빠지면 온몸이 함께 발이 빠지는 방향으로 쓰러졌기 때문에 다시 빠져나온다고 고생이 심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상대적으로 낮은 산이라고 우습게 여겼던 생각은 다시 한번 보기 좋게 깨질 만큼 기진맥진했다. 곧 드넓은 플레제르 스키장이 나타났고 케이블 카가 운영하자마자 올라온 스키어들이 벌써부터 스키를 즐겼는데 등산을 하는 사람은 혼자 뿐이었다. 힘들게 오긴 했어도 지난 두 번의 사투에 비하면 동네 뒷동산 올라가는 것처럼 간편했다. 중요한 것은 4월에 등산을 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커피를 끓여먹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브레방을 향해 길을 떠났다. 몽블랑 쪽엔 맑았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지만 이쪽엔 흐리기만 할 뿐 햇빛이 없어 시원했다. 여기까지 왔을 땐 설피를 신고 고생을 하며 왔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스키를 타던 곳이라 단단해진 눈 위를 걷는데 아이젠의 효과가 만점이었다. 길 것만 같았던 길은 고작 6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브레방 바로 아래 쁠랑 프라즈에 도착했다. 오후 두 시였다. 구름이 낀 몽블랑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어 올라가지 않았다. 카페에 앉아 한동안 건너편을 무상무념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몰랐을 저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플레제르에서 바라본 몽땅베르 풍경인데 왼쪽은 거의 직선 경사다. 건너편 아랫길이 처음 올랐던 등산로이고 윗길은 기찻길이다. 2천 미터 고지인데 저렇게 낮아 보인다


https://youtu.be/syHxUqGsCP0



작가의 이전글 알프스 몽블랑 도전기 6, 사투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