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모니 몽블랑 알펜로즈 게스트 하우스
다시 몽땅베르에 도착했을 때는 18시 30... 기진맥진해서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거의 체력이 고갈되었지만 기찻길을 따라 시내로 향했다. 주말을 넘긴 알펜로즈는 자리가 넉넉했다. 비웃음을 남기듯 떠나왔는데, 완전히 죽는 상을 하고 기찻길을 걸어 알펜로즈에 도착하니 저녁 9시 30분, 그렇게 땡기던 커피 한 잔의 행복, 고난에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용기(?), 주인과 주방장은 나의 생존 귀환을 환영하며 김치찌개와 소주 한 병에 잊을 수 없는 저녁을 먹었다.
상기된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에 뻔하게 개고생을 했음에도 차마 쪽팔려서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산 좋아하는 숱한 프랑스의 한인들이 와서 스키나 보드, 등산과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데, 몽블랑 정상도 못 밟고 죽을 고생 하다 내려왔다는 걸 어쩜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입막음용 뇌물을 바쳐야 하나...... 사장님이 귀한 술이라며 짱박아 두면서 귀한 사람이 오면 준다고 위스키 한 병을 꺼냈다. 사투에 지쳐 살아있는 게 신기했던 그날, 술에 취해 죽은 듯 잠들었다.
내일 재도전해야지......
알펜로즈 전경. 꽤 크고 시설도 좋았다. 아무리 좋아도 그곳의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갑작스레 내린 함박눈과 비를 맞으며 마지막으로 알펜로즈를 나서던 날.
화창한 날씨가 창문을 열고 가만히 눈가를 어지럽히는 아침이 왔다.
어제 고생한 덕분에 정신없이 곤한 잠을 자고 나니 온 몸의 피곤함도 가신 듯했다. 아점을 해결하고 사장님의 '알펜로즈'는 일본인 그룹 관광객들과 대부분의 영국인들, 이탈리아인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스키어들과 산악인들을 상대로 수시로 사람들은 들어오고 바뀌었다.
식당을 겸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식사만 하고 알프스 산맥 중에 가장 높은 곳을 케이블 카로 오를 수 있는 '에귀 드 미디'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이동을 했고 더러의 등산 클럽에서 모인 사람들은 가이드를 대동하고 산맥을 넘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식 식당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룹으로 온 사람에게도 혼자 온 사람에게도 여행 책자가 전해주지 못하는 행복한 정보가 흘러넘치기 때문이었다.
알펜로즈에서 만났던 일본인 등산 전문가는 꽤나 붙임성 있는 싹싹한 젊은이였다.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꽤 어려운 일본 이름이었다. 그는 다른 등산 전문가이면서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한 이탈리아 사람과 함께 몽블랑 꼭대기에 올라가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고 자랑을 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인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이번에 샤모니 몽블랑에서 열리는 최고 산악인을 뽑는 선발전에 일본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고 사장님이 살짝 일러줬었다. 한국인도 여름철만 가끔 오지 이렇게 스키에, 겨울 스포츠에 만능이라 이런 경연대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식을 낳으면 꼭 스키와 잠수와 자유 낙하를 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사장님과 주방장님께 작별 인사를 고하고 어제 버린 설신을 다시 사고 이번엔 기차를 타고 몽땅베르를 올랐다. 먼저 삐에르를 찾아 이렇게 살아 있노라고 자랑을 했다. 삐에르는 어제 내게 겁을 주려고 말한 진실, 즉 길이 없기 때문에 길을 잃고 조난 신고를 하면 헬기가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했었다. 길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살아왔으니 나의 생환 과정을 들은 삐에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미쳤다는 시늉을 했다. 그가 포기나 항복을 뜻하는 제스처를 내다 보이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에귀드미디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9살 토마, 아빠랑 에귀드 미디에서 스키를 타고 왔다는데 몇 살 때부터 스키를 배웠냐고 물어보니 2살 때부터였단다.
몽땅베르엔 벌써 에귀드미디에서 오랜 시간 스키를 타고 내려온 스키어들로 붐비고 있었다. 기차는 샤모니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첫 케이블카로 에귀드미디에 오른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내려온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내려갔다. 그들은 두려움 없는 도전 정신이 가득한 모험에 찬 사람들이었으며 용기 있었다. 또한 즐거움을 만끽할 재능과 위치를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실행할 줄 알았다. 사회에서 성공한 것처럼 능력 있어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들은 멋있었다. 부러웠다.
*** 재도전
44세, 4월, 새벽 4시에 태어났다고 했으니 4자가 많이 낀 너무도 게으르고 싶은 봄이었다.
햇살의 화사함과 샤모니 산맥에 지천으로 핀 꽃들의 경연은 실패한 내 마음에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파리 생활의 실패로 마음은 괴로웠으나 항상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의 나는, 프랑스에 오래 살았어도 샤모니 방문은 처음이었다.
산악 등반에 전문적인 경험이 없었지만 외인부대 시절, 알프스 브리앙송 산악 보병 부대에서 3주간 산악 훈련을 받았던 경험이 전부였다. 그 경험과 전직 외인 부대원이라는 용기는 만만해 보이는 4800미터의 몽블랑 즘이야 걱정할 것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러나, 혼자 전문적인 지식 없이 벌써 혼이 한 번 났음에도 다시 되찾은 것은 용기일까, 객기일까? 나는 왜 이렇게 몽블랑 등반에 목을 매는 것일까?
꼭대기 반대편 대피소와 빙해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난 나는 몽땅베르에서 운하의 바다로 내려가는 50여 미터 정도의 절벽에 설치된 1인용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나, 사다리는 지상에서 2미터 정도 높이에서 끝났고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다시 올라갈 것인지 배낭을 아래로 던져 놓고 뛰어내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절벽 아래는 뛰어내리더라도 착지를 할 만한 공간이 없었고 잘못 뛰어내리면 운하와 절벽 사이의 넓고 깊은 구멍 속으로 빠질 염려가 있었다.
사다리는 절벽에 고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보 부족으로 첫 난관을 맞이한 나는 배낭을 벗어 추락을 방지할 만한 바위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배낭은 아래로 굴러 떨어지다 바위에 걸렸다.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사다리 마지막까지 손으로 내려가 바싹 마른땅 위에 사뿐하게 착지했지만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돌들에 미끄러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대각선으로 기어올라 튀어나온 바위를 잡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배낭을 회수하고 광활한 빙해에 올라섰다.
조금 걸어 뒤돌아보니 등산객용 루트가 따로 있고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사다리가 다른 쪽에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을 보고 혼자 피식 썩소를 지었다. 이러한 정보가 없었는 데다 어디서 구하는지도 몰라 아침부터 체력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지도에 나온 루트를 따라 첫 번째 야영지인 르꾸앙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8시였다. 다리에 심한 경련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의 걸을 수 없을 지경에 배낭은 무겁고 몸은 비정상이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그러나 빙해에서 대피소로 향하는 등산로를 찾을 수 없었던 탓에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절벽을 기어오르다시피 올라온 터였다. 절벽의 결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 너무 다른 것을 다음 날이 밝고서야 알았다.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추락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빙해에서 거의 직선으로 올라온 길. 아직 한참을 더 올라야 대피소가 나와 어두워져서야 도착했다. 대피소엔 여섯 명의 등산객이 가이드와 함께 늦게 도착한 나를 보고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혼자 왔다는 것이 신기했을 것이고 가져온 장비의 미흡과 아시아인이 프랑스어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이 만든 눈초리였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힘겹게 ‘봉스와’라고 인사하곤 와인과 쏘씨송을 꺼내어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오랫동안 생활인으로 살다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올라온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거의 12시간 가까이 흐드러지게 늦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대피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커피와 요리를 파는 곳이었지만 얼음이 녹는 4월은 아무나 들어가서 잘 수 있었다. 모닝커피를 끓여 밖을 내다보니 등산객들은 가이드의 뒤를 따라 벌써 빙해 건너 ‘거인의 이빨’ 정상을 향하고 있는 그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어떻게 저 크래바스 계곡을 건넜는지 신기하게 소리 하나 없이 일어나 벌써 저기까지 갔는지, 가이드 없이 혼자 등반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고작 2천 미터 고지에서 죽을 뻔한 어제의 기억도 까마득하게 잊고 조금 더 높이 올라와 거대하게 입을 벌린 크래바스를 보자, 비로소 의지만 있을 뿐, 몸소 산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알프스의 대피소에서 유유자적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모든 것이 잊혔다.
무모하다는 생각도 없이 커피를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등산로는 운하를 만나자 사라졌고 드디어 난생처음으로 크레바스를 만났다. 말로만 들을 때는 가소로웠다. 영화에서 보았던 크레바스의 위험은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외인부대 산악 전투훈련 때도 크래바스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말로만 듣던 것과 영화로 보아오던 것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던 그것이 처음으로 바로 눈 앞에 조그만 점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나만의 설원에서 유유자적, 아무 걱정 없이 고독한 길이 즐거웠다. 거대한 크래바스 계곡을 지나 거의 평원에 다다랗을 무렵이었다.
상어 대피소에서 바라본 크레바스. 빨간 동그라미 속 가이드를 따르는 등반객들. 17km ‘빙해’는 몽블랑 뒤 편의 스키 계곡 3000미터가 넘은 지점에서 시작했다. 에귀 뒤 미디 정상을 케이블을 타고 올라오면 가파른 경사의 후들후들한 내리막이 있고 스키어들이 다니는 평원이 있었다. 그 평원에서 스키를 타거나 몽땅베르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내려가는 모험가들이 낸 흔적이 펼쳐진 루트가 여기저기 널브러졌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스키어들이 보지 못하는 경사로 둔덕 아래 감춰진 크래바스가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화려한 날, 그 길을 홀로 아래에서 걸어 올라가니 곳곳에 매복한 것처럼 까만 아가리를 벌렸다. 스키어들의 속도로는 그런 곳에 빠질 일이 없었지만 걸어 올라가는 입장에서 보면 건너기 힘든 곳들이었다. 그렇게 시야로 구분되는 곳들을 지나 이제는 더 이상 크래바스가 없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까만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난데없이 나타난 까만 점이, 누가 쓰레기를 버렸나 싶을 정도로 조그만 점에 불과했다. 아니면 조그만 산봉우리가 솟아올랐을까 가까이 가서 보니 주먹만 한 구멍이었다. 스틱으로 휘적거려보니 구멍은 점점 커졌다. 갑자기 머리카락이 쭈삣 서고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온 몸이 경직되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눈에 덮여 있던 크레바스가 4월 날씨에 녹아 드러난 거였다. 이곳의 크레바스는 작게는 30미터에서 깊게는 80미터에 이르는 만년설이 얼어 만든 운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보는 평원은 단지 설원이었고 앞에는 조그만 구멍을 앞에 두고 약간 가파른 평원이었다. 지뢰를 밟은 군인처럼 꼼짝을 할 수 없고 그렇게 식은땀이 흘러 쫄보가 되었다. 곧 해가질 거였다.
[여기서 죽을 팔자라면…… 에라 모르겠다!]
스키어들이 지나간 자리의 크레바스. 길을 잘못 들어 크레바스 밭으로 들어와 버렸고 혹시 스키어들을 만났더라면 십중팔구 충돌이 있었을 루트를 탔다.
https://youtu.be/syHxUqGsCP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