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Aug 17. 2020

겨울 지리산 2, 산에서 불장난하면 안 돼요!

2020년 1월 23일



1987년, 지리산을 화재에서 구한 청년


법계사와 3층 석탑. 부처의 사리함도 같이 있다.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길을 나섰다. 비는 그쳤지만 잠들기 전에 그토록 바랬던 눈은 내리지 않았다. 눈은 밤새, 우리 몰래 내려 아침이면 하얗게 바뀐 세상이 별미였지만 바램은 바램으로 그쳤다. 천왕봉까지는 2km 거리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법계사 뒤로는 암반을 올라갔던 오래된 기억은 더 이상 암반 길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무들이 자라 있었다.


 이렇게 생태계를 보전해 놓으니 길도 짧아 보였고 산행 길도 안전해 보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철 계단은 산행의 묘미를 저감 시켰다. 그렇게 두 개의 평상이 놓여 있는 곳을 지나며 확인해보니 자동심장충격기(AED)와 구급약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저런 것까지 비치할 정도라면 많은 등산객들이 심정지를 당하는 모양이었다.


 한국의 산 중, 가장 가파른 4km 법계사 구간은 의외로 가깝게 느껴졌다. 산행을 시작하면 쉬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무리하지 않게 늦게 걸어야 할 만큼 나이를 먹었는지라, 비록 눈이 없었어도 산행의 즐거움은 그만큼 누렸다고 생각하며 이곳 어딘가에 천왕샘이 있을 텐데,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어 평상이 마련된 쉼터에서 쉬고 있던 등산객에게 물어보았지만 천왕샘의 존재조차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올라가니 천왕샘은 쌓인 눈이 얼음이 된 곳에 감추어져 얼음이 녹아 고인 물인지, 바위에서 나온 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심하게 오염된 것처럼 보여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천왕봉까지 고작 2백여 미터 남았는데 거대한 암석으로 이뤄진 천왕봉 바로 아래 암석을 뚫고 나오는 샘물이라 천왕샘으로 불렸던 이 조그만 샘의 위치는 예전엔 이정표를 만들어 알려주었던 것 같은데, 더 이상 표지판은 없었다. 따라서 아는 등산객들이 주변을 더럽힌 것인지, 그냥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의 샘물은 결국 맛도 보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겼다.


법계사 바로 위에 새로 생긴 평상, 혼자 등산하는 외국인을 보니 완전무장을 했다. 이 근처에 천왕샘이 있는데 아무도 위치를 모르는 걸 보니 지리산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곧 정상에 도착했다. 산정에 올라 뒤돌아보니 운해가 절경을 이루었고 하늘엔 밝은 태양이 운해를 비추고 있었다. 백무동 쪽에서 올라오는 운해가 금방 산정을 덮었다가 걷히기를 반복했다. 밤새 내린 비가 쌓여있던 눈마저 녹였는지 남아 있는 눈은 없었으나 구름이 낮게 깔린 지상에는 아직도 비가 내릴 터였다. 맑은 날 올라오면 남해 바다가 다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은데, 그토록 원했던 천왕봉을 올라오고 나니, 올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성취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손오공이라도 된 듯, 지상에는 비가 내리는데, 구름 위에서 찬란한 태양을 마주했다.


 올라 온 길로 내려가지 않는 철칙에 따라 오랜 추억과 추억 이후의 악몽이 있는 장터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이 없는 아쉬움이 컸음에도 대원사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중산리에 주차한 것을 올라오고 나서야 후회했다. 덕산에 주차를 했더라면 치밭목 산장으로 내려가 대원사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조금 더 길게 여유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생태계 보전으로 예전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제석봉에선 아직도 고사목이 많았지만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아 점점 풍성한 자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세석평전과 벽소령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지프 차량으로도 갈 수 있었던 산맥의 대로도 나무들이 자라 숲을 거니는 멋에 예전의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 숲을 걷다 보면 어느새 벽소령 대피소가 나타났고 이름도 정겨운 뱀사골이니 피아골 같은 갈림길을 만났다.


 88 올림픽을 준비하던 87년 가을, 민둥산 같았던 탁 트인 시야에 온 산에 단풍이 피고 바싹 마른나무와 풀들이 하늘거리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접했던 팝송 Careless Whisper에 푹 빠져 산 정상 바위 위나 햇볕 좋은 풀 위에 누워 망상에 잠길 때면, 텐트를 치고 도를 닦는 중년 부부가 가져다주는 산나무 열매의 이름 모를 맛과, 그들이 전해주는 산 얘기나 세상 사는 얘기에 푹 빠져 있을 때였다.


 비구니가 되겠다며 산에 토굴을 파고 살다가 다른 토굴을 파고 사는 남자를 만나 동거를 하기도 했던 혜숙이 누나와 세석평전으로 놀러 가 토끼를 잡기도 했다. 토굴을 파고 살면서 도를 닦는 혜숙이 누나의 남친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누가 토끼를 잡아 와 자기에게 준다는 꿈을 꾸었다며 내게서 뺏어 풀어주었다.


 하루 만에 성삼재까지 내달렸다 해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날아서 갔다 왔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믿어 의심치 않던 장터목의 형들과 세상 완벽했던 어느 날 하루, 제석봉 어느 풀밭에 누워 청명한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포근한 햇빛에 취해 세상 걱정 없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어디선가 뭐가 타는 냄새가 났다. 누가 불을 땔 일도 없는데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주변의 풀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었다. 


1월의 장터목 산장


 후다닥 웃옷을 벗어 달려가 정신없이 불을 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풀밭에 이는 바람에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혼비백산해서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끄는데 눈에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람이 잦아들어 다행히 불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고 혹시나 남아 있는 불씨가 있지 않을까 확인하며 불을 끄는데 마침 지나가는 등산객이 한 명 있었다.


“산에서 불장난하면 안 돼요!”


 라고 말하곤 무심한 듯 지나갔다. '미친놈! 불 끄고 있구만!'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한 말이었다. 마치 내가 불을 질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 지옥은 한순간이겠구나! 라이터도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않던 스무살 운동선수가 88 올림픽 복싱 4차 선발전을 위해 지리산에서 훈련하던 때였다. 장터목 형들이 챙겨주는 저녁을 먹으며 불난 걸 껐다고 황망히 손짓발짓으로 말하자, 가을철엔 바짝 마른풀에 가끔씩 불이 난다고 했다.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대견해했다.


 어느새 장터목에 도착하고 곧장 하산을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과연 구름이 잔뜩 낀 운해 안으로 들어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계곡엔 얼음이 얼어 장관을 연출했고 바위 계곡에 쌓인 석탑이 구름과 어울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산 길은 금방 중산리에 닿았다. 아무런 문제 없이 산행을 마친 일로 기록된 날, 불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 와서 조선소에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삼성중공업 안전교육을 받을 때였다.

새롭게 들어오는 신규인력을 한 번에 400명씩 투입하는 교육이 일주일에 세 번 있던 때였다. 들어온 사람들은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50% 이상이 퇴사했고 한 달에 10%가 남으면 대단한 조건인, 악조건의 현장에서 교육을 받는데, 교육장 외곽에 설치한 안전교육장엔, 발판, 안전 공구, 소화기 등의 실습장이 준비되어 신입들을 땅바닥에 앉히고 교육을 시켰다.


 외인부대 근무 때나, 프랑스 생활하면서 땅바닥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알프스 산맥 브리앙송에서 산악 전투훈련을 받을 때도 땅바닥에 앉은 적이 없었다. 차라리 서 있거나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하거나 담배를 피웠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눴다. 억지로 앉으라고 말하는 하사관도 없었고 서 있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는 이도 없었다.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이상한 우리들만의 휴식과 교육이 공존하던 시간, 애송이이긴 했어도 프로페셔널로 존중받는 조직 속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한국 중공업에서 교육받는 동안 강사가 무조건 앉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었기 때문에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이 돌아오는 데다 성인인 사람을 성인으로 존중하지 않고 통제와 감시받아야 하는 아이이거나 포로 취급하듯 강사의 말을 조금이라도 어길 시, 퇴사와 해고가 마음대로 이뤄지는 듯 언행이 안하무인이었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강사들의 교육을 필터링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교재로 듣고 배우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경험한 얘기들은 듣고 있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비 맞고 내려온 칼바위 갈림길에 구름이 자욱하다.



 중공업엔 퇴사가 3개월이 넘으면 여기저기 떠돌다가 다시 나왔던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단가를 올리기 위해 여기저기 떠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중공업의 고육지책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더 나은 대우와 안정된 직장보다 싼 가격과 하찮은 대우로 고급 인력을 잡아두려는 전략이기도 했으므로 새롭고 들어온 사람들도 경력이 20년이 넘어도 꼭 같은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안전교육 시스템에 잘 길들여진 우수한 신입이었다. 그런 그들 앞에 신참인 나는 자리에 앉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처음으로 땅바닥에 앉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강사의 표정은 당황스러운 놀라움이 가득 찬 눈빛과 말투로 '왜?'냐고 물었다. 나는 몽블랑 등반을 하다 넘어진 이후로 땅바닥에 앉으면 불편하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전 강사는 등반했던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날 교육은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면서 죽을 뻔했던 얘기로 40여 분간의 교육이 끝났다. 강사의 시도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삼성중공업엔 고산 전문 산악 협회가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 일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신세계를 경험할 것임에 분명했다.


 사건은 숙소에 돌아와서 일어났다.

같은 나이인데 한 번도 얘기 나눈 적이 없는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에베레스트를 갔다 온 사람 앞에 무슨 몽블랑 얘기여!'라고 지날 때마다 말하는 것이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는 얘기를 앞에서 하고 다니는 그를 보고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다는 얘기로 산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닌, 감히 세계 최고봉을 오른 자신 앞에서 산에 대해 말했던 게 꼴 보기 싫다는 시비!


 배려와 존중 없는 한마디 말이 신뢰를 잃게 된다는 진리를 배운 새해 첫 산행이었다. 국립공원 관리 공단 직원들의 전문성 교육이 필요하고 산에서 겸허함을 배우는 것처럼, 마음에 겸손함을 가득 담았으면!




작가의 이전글 겨울 설악산 2, 2020년 1월 18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