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기공
장승포 도서관
그는 9시가 넘어서 일이 끝났다고 장승포 도서관 옆, 편의점으로 왔다. 건장한 체격에 누군가를 엄청 닮아 보였다. 맥주를 두 캔 사서 그 앞에 앉았다. 정말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을 닮았다고 말했다. 이도예는 김태효가 누구인지 안다 모른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외인부대 출신인 것을 카톡 사진인지, 이력서인지, 어디선가 보고 알고 있었는지, 내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카추샤 출신이라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점잖고 신중했다. 물량 팀장 대부분이 가진 오만한 자신감보다는 살아온 인생과 업무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의 언어는 보수적이며 모범적이면서도 다정했다. 업체 사장들이 보기에 믿음직스럽고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판단하는 업무에 대한 대부분의 판단은 나와 정반대였다. 열심히 일하기 위해, 사내 규정을 모두 지켜야 하며, 불만 없이 열심히 일하다 보면 성장한다고 말하며 그래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이 되었다고 자부했다. 그는 자신이 합법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하청의 재하청업에 종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불법이라면 왜 모두가 재하청을 하느냐고 강변했다. 나는 노동자들이 그게 재하청의 불법임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고할 수 없고 안다 하더라도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침묵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도예는 몰래 녹취했다.
좋은 게 좋다고 노동부 지청에서도 불법파견을 당한 재하청 노동자가 불법파견의 인식을 하지 못할뿐더러, 각종 숙소 비용 갈취와 지급되는 작업복 비용, 건강검진 비용 갈취에 대한 인식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노동지청에 신고할 인식을 못했다. 노동지청 사복경찰관들은 노동자가 지적하는 임금 미지급이나 부당해고 등에 관련된 사항 등, 진술서 작성시 인지된 불법에 대해 침묵했다. 그것도 대부분 직장내 괴롭힘과 차별을 당하다 찾아온 노동자들의 억울함이,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는데다, 표현력도 부족하여, 노동지청의 직원들은 빠른 처리를 위해 축소시키거나 중요한 부분들을 빼먹었다. 그렇게 꾸민 조서가 검찰을 통과하기 힘들었고 법원에서 정확한 판단을 받기 어려워 보였다. 무지한 법 앞에 꺾인 좌절은 정의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노무사나 변호사를 통하지 않고 돈 없고 빽 없는 노동자 하나, 공무원의 현란한 조서 꾸미기 앞에 무력하다는 것, 눈뜨고 당했다. 가장 현란한 기술력을 가진 공권력이 경찰이었다.
진취적이든 보수적이든, 올곧은 의지로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대견한 법이다. 이도예의 자부심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따져 물어보겠습니다.
물량팀장으로서, 시간과 노동력을 압박하기 위해 인권유린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정도의 대가를 받고 가장으로서 의무를 지키는 것이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청의 재하청은 불법인데, 무슨 권리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압박하여 일시키다 사람 다치거나 죽으면 책임집니까? 제가 인생을 조금 더 산 사람으로서, 이 팀장님에게 뭔가 교훈을 줄 게 있을 거 같습니다”
“……, 좋습니다. 뭐, 저도 잘 아는 변호사 있으니 한번 해보시죠. 현장 아줌마 찾아서 성희롱 당했다고 증언확보하고 한필이도 성희롱 했다고 증언하던데, 한 번 해보시죠!”
도예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자신이 가진 팀장이라는 위치가 주변의 증언을 확보하기 좋고 무단 결근을 한데다, 정당한 업무를 어겼고 팀장까지 변경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이 인정되지 않았다. 산재는 자신의 몫이라면 해도 된다고 했다.
“그나저나 이정천 일하는 거 보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고,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당 18에 맞춰주면 일하겠습니다”
“안됩니다”
그는 웃으며 간단하게 거절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삐걱거리는 무릎 통증이 정말 불쾌했다. 조깅을 못하게 되니 불안했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 염려됐지만 일을 해야 했다. 국제 안전자격증으로 선주사 안전감독관이 되거나 선주 물량을 받기 위해 조선소로 왔었다. 노동자의 삶은 희망이 없었다. 찌꺼기를 뜯어먹으려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저 불나방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조선소의 환경과 조건이 모든 것을 바꿀 뿐, 싫을 수가 있겠는가?
조선업이 몰락하던 2017년, 목구멍까지 들어온 선주 물량이 몇 개 있었다. 모두 파스칼의 도움으로, 선주 물량을 수주 받기 위해 중급 에이전시, 오션 엔지니어링과 협업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삼성중공업 차장 출신의 대표는 설계변경에 관한 작업을 주로 하던 사람이었는데, 싱가포르를 마지막으로 퇴사하고 고현동에 사무실을 낸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셸 Prelude FLNG 프로젝트 TECHNIP과 INPEX TOTAL 프로젝트에 개입해서, TOTAL 총괄매니저 및 시운전 매니저와 안전 매니저를 포함해 수주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이없는 갑질은, 시운전 분야 계약을, 고작 인력 공급으로만 계약하려 하는 의도에 분노해서 만났던 업체가 5대 에이전시에 속하는 KITCO였다. 그는 총괄매니저와의 미팅에서 곧장 물량을 받았다. 테크니션과 감독관 포함하여 선발대로 90여명을 투입하는, 4개월간 46억이 책정된 물량이었다. 키트코는 68만원에 배팅해서 날려먹었다. 두 번째 시도에 28만원에도 물 건너 간 물량은 돌아오지 않았다. 두 거간꾼들은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는 대신, 나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나의 신뢰는 바닥을 쳤으나 파스칼은 내게 두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최종 청소 물량과 감독관 제안이었다. 웬일인지 나는 거절했다. 팔자에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다시 기회를 찾을 수 있을거란 희미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토요일 5시까지 정상 근무를 특근이라고 말하는 현장의 노동자일뿐, 쳇바퀴 돌 듯 빚과 생활비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장승포 도서관 앞 카페는 한적했다.
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은 더더욱 한가했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길이었고 해안 산책로와 장승포 항을 잇는 주요 도로라 그래도 교통량은 꽤 되는 길목 끝에 소방서와 대형 마트 두개를 제외하면 도서관 앞, 한 건물에 무한리필 고기집과 일식 횟집, 카페와 편의점, 미용실, 아주 작은 옷 수선집, 국수집 하나와 그 옆에 딸린 분식집이 거리를 이루는 거의 전부였다.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교통편이 좋은데다 몇 걸음 걸어 내려가면 장승포항을 마주하는 곳이지만 햇빛이 들지 않는 단점보다 가스비, 전기세가 기승을 부렸다. 월 20만원씩 가스비가 나가고 전기세가 10만원씩 나갔다. 3개월간 20만원씩 가스비를 뜯기자 가스공급소에 가스가 세는지 확인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 검침원은 가스비가 100배 올랐다는 말 대신 어떻게 하면 아끼는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목욕할 때만 제외하곤 겨울에도 욕실 전기 스토브를 켜고 살았기 때문에 처절할 정도로 아낀 결과가 100배로 삥을 뜯는 정부의 뽕뽑는 기법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자주, 아래층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해서 마셨다. 커피는 때때로 다른 맛을 내었지만 진한 맛이 좋았다. 주인은 장승포 터미널에서 술집과 이곳에 간단한 돈까스와 국밥을 겸해 커피도 팔았다. 나이 70에 가까워 허리가 약간 구불어진 이웃은, 극우 유투브 방송을 켜놓고 주방업무를 보았기 때문에 가게에 들어가면 민주당과 이재명을 원색적으로 욕하는 극우 유튜브 방송을 항상 들었다. 주말에 그녀는 다른 동네 교회를 다녀와 가게를 열었다. 자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 민주당 정치인에 대해 욕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이재명이 왜 싫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 놈은 생긴거 자체가 싫다!”
그녀를 찾는 지인들도 다 그 모양인지, 교회 비난을 하면 갑자기 이유 없는 고함을 꽥 질렀다. 이전 광신도들과의 경험을 통해 이런 이웃과 어울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발길이 뜸했다. 옆집 미용실은 TV 조선을 켜놓거나 동아일보를 테이블에 놓았다. 한번 들어가려다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이고 이웃하는 동안 모른체할 수는 없었다. 마음은 멀어졌어도 다정한 미소를 띄고 커피를 사 마셨다. 윤석열 탄핵 이후, 한층 가까워진 우리는 대통령 탄핵은 물론, 전광훈과 손현보로 나뉘어진 광신교도들에 대한 비난에 이르렀다.
“교회가 사랑과 헌신인데, 어찌 증오와 혐오만 가르치는게 무슨 교인이야?”
“너는 다 좋은데 정치적인 면, 종교적인 면에서만 마음에 안든다”
“ㅋㅋㅋ 반사!”
그녀의 광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누그러졌다. 한 번씩 참을 수 없는 모양인지, 증오의 말을 뱉으면서도 자신은 종교와 정치에 무관심하다면서도, 가슴 깊이 숨겨진 증오와 혐오의 표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월세가 밀릴 정도로 경영난에 어려웠음에도 경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기세, 가스비용 등, 한 번도 밀려본 적 없는 그녀의 삶에 대한 노력이 허물어져가는 과정은 그녀의 얼굴에도 드러났다. 언제나 한적한 가게에도 드러났다. 이 모든 것이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 믿던 신념은 도저히 꺾일 기세가 없었다. 결국엔 그녀가 다니는 교회가 경영난으로 폐쇄된 교회를 사들여 신축하거나 증축한 신천지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야 그나마 이해가 됐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신천지라는 사실은 끝까지 숨기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내가 임신 소식을 알렸다. 다가올 일이었다. 나는 금방 담배를 끊었다. 아내는 알제리 국토부 도시계획과 공무원을 그만두고, 7살 된 입양한 언니의 딸을 두고 한국에 왔으므로 시간이 지나며 딸아이를 그리워했다. 아내에게 국제안전자격증 공부를 시켰다. 바로 앞이 도서관이라 자주 갈 줄 알았더니 아내도 나도 자주 가진 않았다. 거의 집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공부를 했다. 우리는 세네갈 LNG 터미널 설치 공사를 기다리면서도 현대 중공업에서 수행중인 NOC 프로젝트나 곧 오게 될 비너스 프로젝트도 준비했다. 우리는 세네갈 프로젝트를 더 선호했다. 그러나 아직도 세네갈과 원청의 계약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나의 일용직 업무도 상황에 따라 변했다. 이런 상황에, 일을 못하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세네갈 업체 대표는 아프리카에서 7년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한 번씩 들어와서 함께 만나면 아내와 말이 더 잘 통했다. 아내도 등을 꼿꼿이 세우고 미소를 간직하곤 막히는 대화 없이 대표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아내는 조선소에서 일하겠다고 졸랐다. 아직 괜찮을 것 같아 보온 팀에 자리를 구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팀장이 식겁 해서 안되겠다고 알렸지만 배가 불러 올때까진 하겠다고 합의가 됐다. 그녀는 팀에 만족했다. 내가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잘 적응했다. 아내는 근면 성실했고 팀장은 배려하며 존중했다. 다 아내의 덕이라고 위로했다.
한달 반 정도의 요양 기간을 보내고, 회사 복귀가 안된다 했으나,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 재입사와 임금협상, 산재를 요청하기 위해 옥포의 한 편의점에서 이도예를 아내와 함께 만났다. 낮에 만나는 그의 모습은 밤보다 편해 보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산재 외에 다른 제안은 거절했다. 오늘은 다른 업체에 서류를 넣는 날이기도 했다. 옥포 외국인 거리, 편의점에서 가까웠다. 이전에 일당 협상에 경력 준기공으로 계약한다고 했으므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도체, 플랜트, 조선소까지 모두 물량팀장들이 채용공고를 올리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들어가서 일할 협력업체명 없이 기본 단가 14~16까지 공고가 올라왔다. 조선소 제외 다른 현장은 8시간 업무 시간을 지켰다. 중간 30분 휴식 시간을 따로 주고 점심시간을 두 시간 주는 반도체와는 달리, 울산 플랜트 현장은 노조가 강성이라 8시간을 지키며 각 30분씩 휴게시간을 꼭 지켰다. 그럼에도 단가가 조선소보다 나았다. 왜냐하면, 조선소는 1시간 연장을 의무적으로 하고 9시간을 기본으로 일해야 일당이 책정되었기 때문에, 실은 13만원도 안 되는 일당에, 휴게시간, 토요일 정상근무를 포함하면 이가 갈리는 착취였다. 게다가 조선소는 공고에 올린 일당에서 협상이 불가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단가를 올리지 않았다. 오래 일해도 조공 일당을 받았다. 물량팀장들의 말은 모두 한결같았다. 다른 거 신경 쓰지 않고 최저 단가로 10년 이상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였다. 물량 팀장의 악랄함은 그런 변명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물량 팀장들은 팀 단가 20여만에 협력업체와 계약했다. 계약서 체결은 회사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다면 구두만으로도 체결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들도 불법파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마련한다는 것이, 회사 소속으로 [기간의 정함이 없는] 일용직 계약을 맺어 팀장으로써 역할을 다 하는 것이었다. 물량을 쳐줄 기술공들은 22만여를 받았으므로 이익을 내려면 15만원짜리 조공을 많이 뽑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소의 구성은, 기공 1명에 조공 1명이 기본이었다. 반도체에는 4~5인이 기본인 건설업인데 비해, 제조업의 특성상, 숙식을 제공해주니 더러 불합리한 점이 있더라도 참고 살라는 뜻인지도 몰랐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했으니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고,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으니 마음 착한 노동자들을 부리면서 마음에 드는 친구들의 단가를 챙겨주며 여기저기 프로젝트를 옮겨 다녔다. 물량 팀장들은 현장일을 하지 않는 관리자로써, 근엄한 보스의 모습으로 군림하려고 들뿐, 리더의 모범을 보이지 않았다.
노동의 활성화는 임금 상승 외에도 휴게시간과 퇴근 시간을 5시로 보장하고 직장내 괴롭힘을 단절하기 위해 괴롭힘으로 인해 퇴사하는 사람들의 증언과 증거를 통해 폭력과 같은 징계를 내리고 오랜 경력과 기술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따로 고임금으로 관리하되, 신규자나 다른 사람들의 업무에 개입하지 못하게 관리해야 했다. 작업이 힘들고 환경이 힘든 것은, 사람이 힘든 것에 비해 견딜만 했다. 직장내 고인물들의 괴롭힘은 신규자를 가르치거나 협력하는 단계가 아니다. 자신의 역량을 사람들 모욕하고 유린하면서 얻는 쾌감이니 필히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했다. 그걸 못해서, 인력난에 시달렸다. 중간급 기술자들의 능력이 단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물량팀장들의 특징 중에 하나인데, 그로 인해, 조선소에는 준기공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량 팀장들은 준기공의 능력을 기술공과 같이 봤다. 그러므로 신규자를 15만원에 채용하고 부릴만큼 부리다가 물량이 끝나면 옮겼으므로 단가 인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계속 옮겨 다니며 경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서로 아는 사이가 되고 지지고 볶고 싸우며 조선소를 맴돌았다. 그들이 조선소의 소문을 지배했다.
외노자들 불러들여 도시를 외노자들의 세상으로 만드는 현상은 대기업이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협력업체를 쥐어 짠 결과였다, 그들은 최하시급으로 몇 년씩 부려먹어도 괜찮았고 인권유린을 해도 괜찮으니 스스로 만들어 낸 결과였다. 외국인 노동자 쿼터 비율이 20%를 넘었다. 이도, 사실은 협력업체가 공식적으로 요청한 인력들이었고 여행 비자로 와서 취업비자로 변경하는 친구들도 점점 늘어났다. 주말이면 도시나 해변에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 중엔 험악해 보이는 우즈벡 출신의 무슬림들도 포함됐다. 이제는 흑인과 북아프리카 무슬림까지 포함해, 그들이 돈이 있어 한국 식당을 갈 리도 없거니와 고향의 입맛에 익숙해진 이들을 사로잡을 한국 음식은 TV 속 한류에 한정되는 얘기에 불과했다. 특히, 엄격한 금욕생활이 종교적 신념과 어울린 무슬림들의 절약 정신은 음료수 한병으로 모든 얘기가 끝나기에 지역경제활성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베트남, 필리핀 등의 친구들은 낚시로 자급자족했다.
현대, 삼성, 한화 조선소가 협력업체를 길들이는 방법으로 ‘능률제’라는 악랄한 기법이 있었다. 1인당 시급 3만원 이상으로 계약했으나 기성일이 되면, 작업 공정이 100%에 못 미치니, 60% 정도를 지급하는 방법이었다. 그 외에도 대금 지급 지연, 기술력 탈취, 경영간섭, 손해배상 청구 및 법적인 압박, 책임전가 및 비용 부담 등, 협력업체를 인력공급업체로 변경하고 노예화 시키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럼에도 협력업체를 운영하겠다고 줄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