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Oct 02. 2019

남도 여행 3, 20년 전 녹동의 기억은 이제 없네

여수 하동 대중교통


 아름다운 금수강산 풍경들이 곳곳에 펼쳐지는 도로를 따라 우리 일행 넷은 곧 강진 읍 외곽도로를 타고 탐진 강을 끼고 돌았다. 인생에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장흥군을 저 멀리 두고 남해고속도로를 만나며 국도를 타고 다시 보성 군 외곽을 돌았다.


 주변으로 펼쳐진 이름으로만 듣던 정감 넘치는 시골의 이름과 들어보지 못한 숱한 산들을 끼고 도는 산천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그 뿐이던가!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이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려 산길을 걷고 싶었다. 길게 뻗은 강을 따라 아무도 다니지 않은 백사장을 거닐며 강물 속에 뛰노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노라면,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선 몰아지경에 빠져 산천의 푸르름과 건강함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던가!


알제리 아틀라스 산맥과 아인 투타(Ain Touta) 마을


 사하라 사막의 황금빛 모래가 눈부시게 빛났다. 가늘게 눈을 뜨고 있기에도 찬란한, 바다처럼 광활한 사막의 바다는 실눈을 뜨고 있기에도 눈이 아팠다. 그 황량한 사막에 사막만큼이나 삭막한 나무 한 그루를 만나면 그도 참 아름답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프랑스 외인 부대 소속으로 중앙아프리카 챠드와 홍해가 끝나는 버뮤다 삼각지대 지부티에서 군생활을 했었다. 한국 군대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경험은 내게 인생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하는 안목과 다양성을 심어주었다.


 더욱이,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4년 동안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사하라 사막의 70%가 알제리에 속해 있다는 사실 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었다. 알제리와 모로코를 가로지르는 아틀라스 산맥을 넘으면 이름도 생소한 도시들이 사하라 사막을 만나는 관문으로 사막과 계곡을 끼고 열대 식물들과 함께 신천지를 만났었다.


 프랑스 생활 20년 동안, 문화유산의 도시 파리와 알프스 산맥, 지중해는 너무 아름다웠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본 유럽은 한국의 도시가 따라가지 못할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중세와 근대를 아우르는 아름답고 황홀한 건축물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 훌륭한 건축물들과 더불어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지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면 산맥과 바다는 자연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도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는데 있었다. 산맥 주변으로 들어선 도시는 깨끗하고 정감이 넘쳐 조금도 위화감이 없어 그저 아름답고 황홀하게 잘 정돈되어 마치 정원을 가꾸어 놓은 것처럼 자연과 동화되어 있었다.

 

 또한 바다와 이웃한 해안 도시들엔 비린내가 나지 않고 바다가 없다면 해안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해서 해안의 전망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쪽빛 바다와 조화를 이룬 도시가 경이로웠다. 버려진 어선이나 어부들의 그물 하나 없이, 건축학적 미학으로 가득 찬 도시를 건설한 그들의 도시 조경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런 해안과 도시를 만든 그들의 미학에 감탄과 경이로운 존중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브레타뉴 지방의 생 말로(해적 도시)


 그런 내게 서울의 도시 숲 높이 전봇대의 전선줄들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밤이면 유흥의 네온사인이 온갖 간판들로 이루어진 도시는 요란하고 정신 없었다. 남들보다 더 눈에 잘 띄게, 남들보다 더 크게 만들어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려는 이기심이 가득한 도시의 네온사인은 시골에도 꼭 같은 모양으로, 나라 전체가 그런 전체 이기주의로 발전했던 것일까!

 

 그러나, 서울에서 다른 나라의 유명한 도시들보다 더 자랑 삼을만한 것이 내겐 한국적인 소박하고 정감 넘치는 전통 건축물과 산이었다.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은 내세울 것 없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자랑 삼을 수 있어서 외국 친구들을 만나면 인사동과 산을 오르라고 추천하는 게 한국을 오래 떠나 있었던 내 제안이었다. 




 어느새 벌교를 지나고 있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소녀처럼 대합실에 가득하던 모습은 내게 신기하게 다가왔었다. 남자들은 모두 어디를 가고 할머니들이 절대 다수였던 버스 대합실은 시장에 벌교 꼬막을 팔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벌교 세발 낙지나 해산물을 팔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지, 시장을 보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지도 모를 기다림에 바닷가 여자들의 억척스러운 삶이 연상되었을까? 아직 한 번도 발 디뎌본 적 없는 벌교를 두 번째 지나고 있었다.


 25년 전, 고흥, 녹동을 배경으로 어초 공사를 할 때, 대중교통을 한 번도 이용해보지 않았다는 기억은, 벌교를 한번도 스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벌교가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으면서도 순천에서 곧장 내려가면 고흥을 거쳐 녹동을 갔기 때문에 벌교는 조정래의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마을에 불과했다. 이념의 경험이 없음에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이 지척이었고 소록도라는 한센병 환자들의 기억이 원체 강했기 때문에 52해 인생의 기억은 짧고도 한심했다. 심지어, 여수가 경상도 시점에서 고흥보다 가깝다는 현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숱하게 다녔던 남해에서 바로 보이는 섬이 여수였다니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었구나! 철 없는 인생은 바뀌는 것 없이 아직 25년 전의 기억에 머물러 천지분간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였구나!


 김 사장은 조그만 키에도 불구하고 기막힌 운전실력을 보여주었다. 외인 부대에서 장갑차 파일럿이었다며 운전대를 잡아보겠다던 계획은 그의 운전실력에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네비게이션도 없이 길을 척척 찾아냈다. 완도에서 올라온 해양환경안전 감시단 팀들과 점심 약속을 하기로 한 식당을 금방 찾아내곤 공사중인 식당 옆자리로 안내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마중하러 대표는 역으로 마중을 나가고 나와 효재 형님은 곧장 세미나가 열리는 현장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여수의 최신 소식을 성실하고도 친절하게 알려주곤 오래 되어 폐쇄된 돌산대교를 돌아 여수엑스포를 위해 새로 놓인 거북선 대교를 건너 돌산도로 들어가 세미나 현장에 도착했다. 오후 1시였다. 


리조트 뒤편에서 본 풍경


 잠시 카페에서 테크닙에 보낼 프로젝트 최적화 플랜을 작성하자 금방 세미나 시간이 왔다.

이번 한국해양환경안전 감시단 발족식은 해양안전부의 후원을 받고 국토해양부와 해양수산부의 지원을 받는 사단법인 한국해양환경안전 협회에서 주최했다. 리조트를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준비가 부실한 것이 아닌가는 의문이 많이 들 정도로 정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세미나실이 마련된 곳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미나를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인원이 모자라지 않을까 싶던 걱정도 기우였음을 금방 깨달았다. 오히려 150여명을 채울 수 있는 세미나실이 좁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완도와 해남에 들러 김 공장을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해양환경안전 감시단의 흔적도 찾을 수 없던 조직이, 바다를 낀 각 지역에 지부를 끼고 있었던 것이다.


 세미나는 국민의례를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해서 어색했다. 대정부 사단법인 산하 조직인데 국민의례를 하는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이윽고 관계자들의 인사와 초빙된 교수에 의한 해양오염 정도와 방안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고 환경오염 감시를 위한 드론 촬영 기술에 대한 프레젠테이션도 이어지면서 현재 감시단이 가진 자원으로서는 구체적인 활동에 대한 제약을 완화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되어 단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각 지부 회장의 인사가 이어지고 환경오염 방지에 대한 자원봉사 활동 보고도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시단으로 선정된 사람들의 신분증 수료를 끝으로 세 시간 동안의 세미나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시간에 맞춰 끝나고 야외에 마련된 바비큐 파티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각 지역 별로 자리를 잡자 주변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공감대 없이 역시 끼리끼리 문화가 자연적으로 형성됐다. 고기가 익고 협회 중앙 위원들이 돌아다니며 세미나의 취지와 관련된 사람들의 의문사항들을 답하면서 연대감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개 이런 모임은 한계가 있었다. 모두 맡은 자리에 앉게 되면 이동이 적은 한국식 문화는 끼리끼리만 얘기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그것보단, 테이블은 서 있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몇 개만 마련해두고 나머지는 도두 이동이 간편하게 서서 먹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다양하게 사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서양식 계기가 되었지만 한국식 문화는 한 번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가기 때문에 언제나 아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부였다.


한국해양환경안전 협회 중앙회 단체 사진. 가운데 손짓을 하는 이가 김창완 협회장이다.


 친화력이 대단한 김 사장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며 동생들을 소개시켜 주는 것 외에, 홀로 제주도에서 참여한 젊은 여성이 우리 자리에 어울려 참신함을 전해 준 것 외엔 저녁이 무르익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갈 길로 가버렸다. 회원들을 위해 마련된 리조트 숙소는 모르는 사람들끼리 여럿이서 자는 혼숙이라 각자 돌아갈 길로 가는 것이 편한 모양이었다. 효재 형님도 막차를 타겠다고 일어섰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선잠을 자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도 결국 자리를 뜨고 내일 하동 방문을 위해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숙소를 구했다.


 여수는 2012년도에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프랑스어 통역으로 갈 때 여수 기반의 토목업체 소속으로 갔었다. 타 지역에서 면접을 보러 왔다고 차비를 주던 유일한 회사였고 업무 추진력과 직원 관리도 복지를 기반으로 해서 좋은 인식이 남아 있던 곳이었다. 벌써 7년 전이라는 기억보다 예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내가 기억하던 현장들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하나 알고 있던 장소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뻔한 도시의 길거리는 아무런 추억을 소환하지 못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가을이 오는 하동의 섬진강을 산책하고 싶다는 욕심에, 아프리카 가봉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과 약속된 저녁 6시 전에, 산행을 하고 샤워를 끝내고 깔끔한 정신으로 만나고 싶었다. 인터넷 서핑으로 버스 편을 찾아봐도 여수에서 하동으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순천과 광양에서 찾아보아도 가는 버스가 없었다. 이번에는 순천과 광양에서 찾아봐도 하동으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광양에서 시내버스가 띄엄띄엄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시간확보를 할 수 없었다. 순천으로 먼저 가기로 했다.

 

 장딴지 파열이라는 얘기치 못한 사고를 겪었기 때문에,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뱃살의 우람한 지방을 보며,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길 수일, 일주일간 조깅을 할 수 없다는 슬픔에 운동복도 준비해오지 않았지만 시간 날 때 산행이나 하려는 절호의 기회였다. 순천에서 하동으로 가는 기차가 있다는 정보에 역을 지나는 버스에서 후다닥 내려 알아보니 오후 5시에 한 대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순천 터미널로 걸어가서 확인해보니 하동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상도 진교를 가서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천에서도 지척인 하동이 행정도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경상도를 넘어가야 하동 행 버스를 탄다는 게, 순천 사람들은 하동에 갈 일이 그다지 없다는 뜻인지, 최첨단의 시대를 살면서 교통편이 이리 어렵다는 사실에 실감하며 어쩔 수 없이 진교 행 버스를 타고 다시 하동 행 버스를 타고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하동 터미널에 도착했다. 산행은 진작에 물 건너 갔다.


고즈넉한 한옥이 남아 있는 곳이 유일하게 정감이 갔다. 하동 어딘가.


 남수는 하동 화력 발전소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프리카 가봉에서, KT가 수주한 광케이블 설치 프로젝트에서 거의 약탈 당하다시피 가봉 발주처와 현지 작업자들에게 당하고 파산에 몰려 있었다. 또한 원청이던 KT engcore로부터 투자했던 돈과 수행했던 프로젝트 비용도 받지 못하고 난관에 처해 있었다. 우리는 하동 시장, 막 문을 닫으려는 식당에서 아프리카 가봉이 악몽이 되어버린 남수를 위로하며 밤을 보냈다. 거제로 돌아오려던 버스는 모두 끊겨 있었다.


 바가지를 씌우려는 모텔을 돌아서려 하자 2만원이나 깎였다. 불편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나는 곧장 사천으로 향했다. 진주로 가야만 사천으로 갈 수 있었다. 새로 바뀐 사천터미널에서 사천 세무서가 있는 시청까지 가려면 사천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거나, 최소 한번을 갈아타야 했다. 개인사업자 재등록은 종이 한 장에 간단하게 적어 끝이 났다. 그리고 다시 진주로 와서야 거제로 돌아와서야 일주일의 일정이 끝났다.


가봉 광케이블 설치 프로젝트 아침 조회 현장


작가의 이전글 남도 여행 1, 완도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