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Oct 09. 2019

예기치 못한 야간 산행

거제 국사봉에서 옥녀봉까지



 10월 5일 토요일, 프랑스 부뤼노와 산행을 하기로 약속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물을 때면 '와 부리노?(경상도 사투리로 '왜 불러')로 가르쳐 주던 이름이었다.


오후 두 시부터 애드미럴 호텔에서 만나 15km 가량 걸린다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국사봉까지 오르는데 40~50분, 옥녀봉 거쳐 장승포 문화 예술회관까지 6시 정도면 충분히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달한 터였다. 혼자서는 뛰어다니는 곳이었으나 장승포에서 국사봉으로 오는 코스를 선택했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가는 방법은 항상 헷갈리는 구간이 두어군데 있어서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일쑤였다. 동네 뒷동네 산에서 길을 잃다니...... 그리고 보통, 2시간 운동거리보다 두배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네 시간을 할애해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주저한 길이었다. 무심코 부리노에게 '산에 가자'고 핬던 말이 현실이 됐다.


 하루 10km의 조깅 목표가 있었고 산행을 해도 그 목표를 유지했기 때문에 웬만해선 목표를 넘겼었다. 10월 1일, 장단지 파열 이후, 서울 청계산 15km 횡단을 한 후 4일만의 산행이었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가을 산행은 언제나 가슴 설랬다.


 부뤼노는 1m 90의 거구다. 덩치에 비해 살짝 비만이긴 해도 체격에 잘 어울렸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한달 후면 중국 총괄 책임자로 떠나기 전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이었다. 나는 완도, 해남, 목포, 고흥으로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고 브뤼노도 막바지 프로젝트 완료를 위해 일정이 바빴다. 최근에 가장 자주 만나는 유일한 1인이라 우리는 벌써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오후 두 시, 약속보다 15분 빨리 애드미럴 앞에 도착한 그를 만나러 후다닥 산행 복장으로 갈아 입고 가보니 곰 패션으로 깔맞춤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곰랑 산행하겠네! 사람들 공격하지마~"


 우리는 즉시 국화봉를 향해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약수암에 이르러 본격적인 산길이 나타났다. 능선을 타는 갈림길까지 한 슴에 다다르고 뒤돌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한대 피워 물고 다 피울 때즘 느릿하게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올라 오는 그를 향해,


"확실하게 위험한 곰은 아니네! 담배 한대 필래?"


 브뤼노가 혀를 내두르며 손절 했다.

매일 모듈을 오르내리면서 운동량을 체크했지만 산행을 하니 힘든 모양이었다. 담배를 다시 피운지 1년 쯤 됐나?


 2018년 9월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옥포 밤거리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옥포의 제일 핫한 바 운타운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였다. 노르웨이 친구들이 최고의 손님으로 웬만한 연봉보다 많은 돈을 벌며 옥포의 명물이 될 조짐이 보였다.


노르웨이 Statoil 선주사 매니저들과 왼쪽이 삼성중공업에서 일하는 친구
남편을 그리고 자신의 눈만 그렸을 뿐인데, 환희에 젖어 혼자 춤추는 귀부인


 브뤼노는 1년간 금연을 하고 있던 내 옆에서 두더지라도 잡을만큼 줄 담배를 피워댔고, 그림 그리는 실내가 마침 길거리 옆이라 애연가들이 피워대는 연기에 미스크도 쓰고 온갖 방법으로 담배 연기를 피하려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브뤼노에게 담배를 얻어 피운게 1년 동안 피워오고 있었다. 때때로 나를 골초로 만든 원흉이 브뤼노라고 놀렸으므로 소심한 복수 삼아 권한 담배를 거절하는 걸 보니 오랜만의 산행이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브뤼노는 전처와의 사이에 세 자녀가 있었다.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나고 자란 프랑스 중부 지방 클레르몽 페랑의 웅장한 휴화산의 장관이 펼쳐진 사진들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면서 공무원인 동생이 반복된 일상에 휴가 때, 한 번씩 다니는 해외여행에 비해, 자신은 일상이 세계 여행이며 알레스카를 비롯한 자신이 다녔던 국가들에 대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최근 중국 프로젝트에서 만난 복스러운 여자와 결혼을 했고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서 중국으로 총괄 매니저로 2년 동안 파견 가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 브뤼노를 '애기 생산 전문가'라고 놀렸지만 애 하나 없이 독거노인으로 사는 내 푸념이 시기와 질투로 표현된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러브스토리를 자주 얘기했고 그 얘기는 영화처럼 너무 흥미로웠다. 2차 대전 막바지, 프랑스와 독일의 격전지 스트라스부르그를 배경으로, 프랑스인 할머니가 패잔병 독일인을 살려주면서 맺어진 가족 관계는, 그야말로 전쟁 속에 피어난 스펙타클하고 가슴 뭉클한 영화적 인류애만큼 감동적이다. 뿐만아니라, 어느 부유한 한국인 사업가 집에 초대 되어 갔을 때, 그 집에서 귀하다며 내 놓는 음식들을 먹어보더니 금방 그 출처와 귀함을 알아낼 정도로 귀족 교육을 받았음을, 언행에서 알만큼 신중하고 귀함이 묻어났다.


 한숨을 돌리고 400여미터를 가자 체육공원이 나타났고 정상은 뷰가 별로라 패스하고 곧장 옥녀봉을 향했다. 이때부터 지루하고 단조로운 길의 연속이었지만 힘든 것 없이 산책하듯 새소리와 더불어 정감이 갔다. 정상 능선에선 바람이 꽤 거쎘다. 아직 단풍이 오지 않은 풍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끼며 신나게 덩실거렸다.


 뒤에서 자꾸 뒤처지는 브뤼노가 잠깐 쉬어가자며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에 걸터 앉았다. 조금만 더 가면 정자가 있으니 거기서 편히 쉬고 담배도 피자고 꼬시니 예의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5백여 미터 가면 아주동과 문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정자와 함께 있을 터였다.

  이 능선 길은 의외로 길었지만 예전에 체력이 좋았을땐 크로스컨트리 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한동안 뛰어다니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지루하게 길 줄은 몰랐다. 꽤 높이 자란 오솔길의 풀들이 높게 자라 인적이 드문 것처럼 길을 가렸고 한 번씩 만나는 잘 정돈된 무덤이 괜한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곧 사거리와 함께 정자가 나타났다. 힘들면 여기서 내려가자고 말하니 그래도 계속 가겠다며 나를 앞장세웠다. 그러면서도 '이제 오르막은 얼마나 남았어?' 하고 물었다. 옥녀봉 정상을 오르는 이 길이 끝나면 오르막은 없었다.

  

산 정상에 선 브뤼노의 늠름한 모습


 시간은 어느듯 어둠이 깔리고 세찬 바람이 인적 없는 산길을 휘저었다. 옥녀봉 정상을 오르면 6시가 될 것 같아 장승포까지 완주는 힘들 것 같았다. 가볍게 생각하고 물도 랜턴도 가져오지 않았던데다 휴대폰 밧데리도 간당간당한데 보조 밧데리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산행 어플 실행을 중단했다. 브뤼노도 물을 가져 오지 않아 한 번씩 만나는 약수터가 갈증을 해소했고 산행 중에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 나는 단련된 덕분인지 그다지 갈증이 없었지만 약수터의 물로 얼굴을 씻고 목을 축였다.

 브뤼노에게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장관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지금 하산을 하느냐, 계속 가겠냐는 질문에, 산행을 이어 가기엔 무리다 싶었지만 '너를 따르겠다'는 그의 요청에 정상에 다른 시간이 6시 15분 전이었다. 산정에 텐트를 치고 있던 화재 감시자가 늦은 시간에 올라온 우리를 반색했다.


"여기서 바로 하산하면 아주동으로 내려갈 수 있어. 20여분 걸려. 장승포까진 아직 한 시간을 더 가야하는데 어떡할래?"


"계속 가자! 완주하지 못하면 계속 기억에 남을 거 같거든!"


"좋아! 직진!"


 아이폰 헬스 어플에서 그는 벌써 100층 이상을 걸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가 수행하는 업무는 모듈 꼭대기에 열변환 장비를 설치하는 일이라, 매일 업무 진행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듈 꼭대기를 오르내리면서 실행하는 어플이 그의 건강관리 방식이었다. 겉으로 보이기엔 멀쩡한 그가 다리가 이미 풀렸다고 말했음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신기했다. 푸념하며 내려가자고 말할거라는 예상은 보기좋게 어긋났다. 둘은 정자에 앉아 담배 한대씩을 피우고 다시 마지막 여정을 향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곧 어둠이 떨어졌다. 휴대폰을 두 대 가져온 브뤼노의 기지 덕분에 이미 밧데리가 다 된 내 휴대폰을 대신해서 밤길을 가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한 번 진창에 미끄러지고 브뤼노도 심하게 미끄러져 넘어졌다. 어둠 속에서 맷돼지인지, 심한 바람 속에서도 확연한 소리를 내며 신경을 곤두 세우게 했다. 태풍 타파의 영향인지 나뭇잎이 거의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곳을 지날 때, 길 위에 덮인 나뭇잎을 밟고 지나가는 상큼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대우해양조선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기 대우조선해양 동문이야. 그 앞에 주유소가 있는데 그 쪽으로 내려갈거야. 이 만큼 왔으니 거제문화예술회관으로 내려가나 저렇게 내려가나 거리는 똑 같아"


"오케이! 이제 끝이 보이는군! 근데도 아직 많이 남아 보인다"


 다리가 이미 따로 논다고 말하면서도 목소리와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땀으로 저린 내 얼굴이 더 피곤해 보일 정도였지만 얘기치 않게 찾아온 야간 산행에서 한 번도 본적 없는 대우조선해양의 야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야간 산행에 익숙했다. 베낭이 필요한 산에 다닐 땐 만일을 대비해서 항상 렌턴과 비상 식량과 물을 충분히 확보했다. 그러다가 얘기치 않은 불상사로 원치 않은 야간 산행을 지리산에서 여러번 한 적이 있었다. 몽블랑 산행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하는 야간 산행은 적절한 공포 속, 무아지경의 적막이 전해주는 짜릿한 전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을 모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청명한 하늘 아래, 단풍이 지천으로 아름다운 가을 산행보다, 폭풍우 몰아치는 극한의 산행이 더 기억에 오래토록 각인되는 것처럼!

 

 알프스 몽블랑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려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화려한 조명의 도시가 손에 잡힐 것 같은데도, 혼자 길을 잃고 사투를 벌였던 어리석은 위기는 한국의 산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우기 동네 뒷산 같은 이런 얕은 산은 어느 길로 내려가도 상관 없이 일부러 길이 아닌 곳을 선택해서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그것도 철 없던 한 때였다.


 그리고 일운 터널 위를 지나자 차가 다닐 수 있는 교차로가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 눈을 바라보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스팔트가 깔린 그 길을 선택했다. 내 기억에 없는 길, 다음 카카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길이었다. 대우 정문까지 걸어 버스를 타자, 온통 땀으로 젖어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퇴근 길 시내버스 승객들의 눈길을 즐긴다. 옛날엔 이렇게 나타나면 북한 간첩으로 오해 받아 경찰서 조사를 받았을 거라는 농담을 즐기며 우리는 옥포로 돌아왔다.


 7시 15분이었다.

뒷동산 한바퀴 돌려다 야간 산행을 하게 된 날, 샤워를 끝내고 저녁 파티를 위해 다시 모여 오늘도 술로 밤을 채운다.


대우 조선 해양의 야경



작가의 이전글 남도 여행 3, 20년 전 녹동의 기억은 이제 없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