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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Sep 29. 2019

남도 여행 1, 완도의 추억

한국해양환경안전협회 세미나


 태풍 타파가 몰려오는 거제도를 떠났다.


 일주일간의 긴 여정이었다.

장딴지 파열로 산행이나 조깅을 할 생각은 아예 포기해서 백 팩의 짐이 간편했다. 한참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게 마음이 아팠으나 장딴지가 원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아쉬워도, 간편하게 구두와 양복, 갈아 입을 옷과 양말 두 켤레가 전부였다.


 진주 세무서에 자진 폐업되어버린 개인사업자 회생을 위해 폐업 정정 신청서를 작성하러 갔더니…… 사천 세무서가 관할 지역이었다. 오후 다섯 시, 사천으로 가기에 늦은 시간, 진주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가볍게 포기한다.


 아침 7시,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순천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탄다. 완도를 가야 하지만 직행으로 가는 버스 없이 순천에서 갈아타야 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완도, 목포, 녹동 일대에서 어초 공사를 해봤던 경험으로 형님의 차를 타고 다녔던 곳이라, 25년이 지난 지금 버스를 타고 가는 정보를 구글링 해보았더니 명확하게 나온 것이 없었다. 일단 순천에 가봐야 했다.

 

 순천에 8시 20분에 도착, 완도 행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9시 55분이 첫 차다. 이런! 일찍 온 의미가 없다. 피곤한데 잠이라도 푹 자고 나올걸, 새벽 두 시에 깨어 잠을 설쳤던 탓에 짓누르는 졸음이 무겁다. 바람은 없지만 흩날리는 비를 맞으며 오래 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기억으론 순천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엔 번화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도 앱으로 찾아 보아도 시내를 찾을 수가 없다. 비를 맞고 돌아다녀 보기로 한다. 우산을 쓰기에도 애매한 빗줄기는 태풍이 닥쳤다는 느낌도 없이 간헐적인 빗 속을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1층 건물의 단조로운 병원들이 나타난다. 촌스럽기도 하고 전통적인 특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군락을 이룬 병원들 위로 촘촘한 전기 줄이 하늘을 바라보는데 방해 된다. 심지어 흉측스럽기까지 하다.


순천 풍덕교에서 바라 본 순천동천


 백 년을 내다보는 도시계획 플랜이 있었다면 저러진 않았을 텐데, 눈 앞의 편의를 위해 주먹구구식 행정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아쉬운 발길을 돌리지만 빗줄기가 거세진다. 처마 밑에 잠깐 들어가 비를 피해보지만 금방 줄어들 기세가 아니다. 근처의 숱한 병원에도 불구하고 편의점도 하나 보이지 않더니 마침 담배도 다 떨어졌다. 오호 통재라! 빗줄기가 살짝 잦아든 틈을 타 후다닥 터미널로 뛰어간다.

 얘기치 않게 생겨버린 여유 시간에 주변의 식당이나, 커피 한 잔 할만한 공간을 찾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온 버스터미널에서 담배를 사고 처마 밑으로 나와 한대 길게 연기를 들이킨다. 여행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자긍심은 미리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헛된 시간을 낭비한다는 교훈을 다시 되새기며 완도 행 버스에 올라타 잠을 청해본다. 곧 버스가 정류장을 떠나 굵은 비가 쏟아지는 남해고속도로로 들어선다.


 잠깐 가더니 도로에서 빠져 벌교로 들어선다. 처음 오는 곳이다. 벌교는 세발 낙지가 생각난다. ‘벌교에선 주먹자랑 하지 마라’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구수한 벌교 사투리를 쓰던, 언젠가 만났던 사람의 얼굴이 긴가 민가 떠오른다. 시간 여유가 되면 주변을 얼쩡거려 보고 싶은 것이 이런 버스여행의 즐거움이겠지만 잠깐 들어와 주변 마을로 향하는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가득 태우고 버스는 금방 움직이기 시작한다. 조그만 지방도를 따라 금방 보성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화장실에 가려 잠깐 내려보니 온통 할머니들만 대합실 의자를 가득 채우고 주름살 깊게 패인 호기심 가득한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티비를 시청하고 계신다. 가만 보니 완행 버스다.

 

 한 번도 와보지 못했지만 언론매체를 통해 익히 들어 본 보성 녹차 밭으로 유명한 곳이란 얕은 지식이 얼핏 스치고 버스는 장흥을 거쳐 강진, 해남, 그리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조그만 마을의 버스 정류장들을 거쳐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완도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하나 샀다.


 1995년에서 1997년까지 완도와 녹동 등지를 오가며 어초 공사를 하던 기억을 떠올렸으나 내가 명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버스터미널과 붙어 있는 인부들 밥을 대먹던 식당이었다. 과부인지 아들 하나와 억척스럽게 일을 하던 정감 넘치는 안 주인을 찾아보려 식당들을 기울여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꽤 넓었던 식당을 가진 곳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작고 다부지던 안 주인도 찾을 수 없었다. 수소문을 해보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뿐, 25년의 첫 추억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제 하나 남았다. 

장좌리 그 분의 집이다. 어쩜 경상도 남자가 완도 처자를 만나 결혼해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을지 모를, 내 한국 인생의 마지막 족적을 남겼던 그 댁 안방마님의 고운 얼굴이 아직 남아 있을까…… 지난 세월, 망각의 무게에도 장좌리는 그대로 남아 있을까? 명사십리의 아름다운 해변은 이제, 영업을 하려는 팬션과 모텔 등의 상업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전통의 아름다움도 없이, 언제나처럼 주먹구구식 전시행정과 무자비한 건축물들이 아름다운 황금빛 해변과 조화를 이루었으면 하는 옅은 기대감을 뒤로 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려 보았다. 그때 머물렀던 여관과 다녔던 길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작업 현장이 어디였었는지도 기억에 없이, 단 두 가지 선택적 기억만 난다는 게 신기했다. 


완도로 들어가는 대교 위에서 바라본 완도는 이미 타파가 할퀴고 있는 중이었다.


 완도에서 만나기로 한, 몽골 스마트 팜 프로젝트 설계자이면서 한국해양안전 협회 감시단장을 맡고 있는 대표님이 시간 맞춰 도착했다. 우리는 곧장 완도에서 유명한 개성 순두부 집에서 게눈 감추듯 해물 순두부를 해치우고 완도 대교 아래 ‘까만 콩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타파가 점령한 바다는 하얀 거품을 쏟아내며 바닥까지 뒤집어 놓았지만 다도해 섬 건너건너 바람이 죽고 파도가 힘을 쓰지 못하는 연안 앞바다는 그나마 먼바다보다 나을 게 뻔했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 본 연안에 묶여진 고깃배와 김을 채취하는 배들이 방파제의 보호를 받으며 비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된 체 파도를 따라 삐거덕 덜거덕 춤을 추고 있었다.


 나처럼 골초인 대표님과 바다를 바라보며 맞담배를 폈다. 사실, 거제 옥포 집을 떠나기 전, 담배를 끊겠다고 금연 패치를 갖고 붙여 올까 하다가 포기했었다. 대표님이 비흡연자라고 착각했다가 골초라는 사실을 알고서야 포기했으니까. 우리는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횟수로야 10년도 넘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일산 마두역 사무실에서 북한산을 종단으로 넘어가 처음 만났고 파주 공장을 황룡 산을 횡단해서 만나러 간 것이 두 번째였다. 그 전에 만났었을 수도 있지만 기억에 없었다. 우리 사이엔 효재 형님이 있었다. 두 분다, 띠 동갑인데 어쩐지 나이 든 것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젊음과 참신함을 유지했다. 공허한 하늘에 초점을 잃은 시선의 몽상가가 아닌, 그가 설계하고 구상한 것을 현실화하려는 도전이자 모험가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몽골의 사막화되는 초원 위에 스마트 팜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그리고 정부 산하 연구원에 프로젝트 실현 타당성 조사를 맡겼고 결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 프로젝트의 총괄매니저로 낙찰되어 파주 공장에도 가서 그의 꿈을 확인했고 오늘 완도에서 다시 만난 것이었다. 저녁이 되면 효재 형님도 대전에서 학생들 산행 가이드를 마치고 내려온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오래된 지인들이 모여 완도, 해남, 고흥, 녹동 지역의 김 공장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3년 전부터 이곳에서 실행했던 폐수처리 설비관련 시장 조사를 끝내고 업체를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창 밖의 폭풍우는 점점 거세어지고 소안도에 들어가 업체를 방문하기로 했던 미팅 약속은 애석하게도 태풍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밤이 되자 창문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는 더더욱 거셌다.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도착한다던 효재 형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벌써 만나지 못한지도 5년이 훨씬 넘은 듯 한데, 그때만해도 암에 걸려 수척했던 모습이 이제 암을 스스로 완벽히 극복해낸 모습이었다. 우리는 김 대표가 단골로 간다는 ‘완도 우성종합어시장’으로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갔지만 태풍으로 모두 문을 닫았다. 주말에 여행객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릴 시장이 모두 문을 닫아 우리는 문이 열린 ‘완도 음식 문화거리’에서 벗어나 해변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서 아직 문을 연 횟집을 발견하고 가을 전어를 사서 슈퍼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산 다음, 피아노 모텔로 돌아왔다. 


까만콩 카페에서 바라본 완도 대교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세서 모텔 정문은 모두 폐쇄된 상태였다. 건물 뒤편으로 열어둔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거셌다. 둘이서 두더지를 잡았던 덕분에 열어둔 방문으로 괴이한 소리를 내며 바람은 멈추지 않고 복도를 휘저었고 술만 마시면 에너지가 넘치는 60이 넘은 두 분의 고성방가가 음향을 더해 늦은 밤인 데도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정말, 여행객들은 미리 여행을 포기했는지도 몰랐다. 두 분의 에너지 넘치는 대화는 냉철한 판단력을 유지하려는 효재 형님과 어떻게든 밀어붙여야 한다는 계획이 첨예하게 대립되었고 두 분 사이에서 그나마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한마디 하면 두 분은 다시 다투는 것도 같은 논쟁이 다시 불씨를 붙였다. 나는 마치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자리에서 인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바람이 잦아 들면 아침 산책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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