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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pr 16. 2019

파리, 룩상부르그 정원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치를 만나다.

 

왼쪽의 퐁네프 다리와 사진 중앙의 앙리 4세의 '팔팔한 오입쟁이' 정원, 그리고 센느강. 오른쪽이 루브르 박물관.



 여유자적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걷는다.

10박의 그랑 투르 드 몽블랑(GTMB)을 떠나지 못하는 한을 이렇게나마 위로 하면서 근사한 카페 테라스를 만나면 커피를 마신다. 한국의 카페와는 거리가 있다. 미세먼지가 극성인 한국 사회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기 힘들 정도라, 봄이 오는 계절엔 중국의 황사로 근심이고 천고마비의 계절에도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권유하는 사회에서는 테라스에서 마시는 여유로운 커피가 먼 나라 이야기다.

 

 파리의 하늘은 맑다. 그러나 거리의 먼지나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먼지는 피할 방법이 없음에도 파리지앙들의 여유는 그런 불편함 즘이야 신경도 쓰지 않는다. 햇빛에 민감한 한국 사람들의 인식마저도 가볍게 무시할 만큼, 파리지앙들은 햇빛을 좋아한다. 주말이면 마을 공원에 수건을 갖고 나와 선크림을 바르고 광합성을 즐기는 나체족의 여유 또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상 중에 하나다.


 요즈음 한국의 카페를 보면, 테라스도 멋있고 사람들도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엔  무료한 여유가 느껴질 뿐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중국 황사에, 미세먼지에, 대기 오염까지 염려스러운 한국이, 몇 백 년의 전통을 간직한 파리 지하철을 접하고서 느낄 문화적 괴리감에 대한 충격이 대단하리라!

 

 더우기, 파리에선 우연히 길을 걷다가도 속 옷을 보는 민망함을 자주 경험한다. 그냥 보이는 거라 볼 뿐, 시선을 회피하거나 쑥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파리도 성추행 문제가 사회 이슈화 되었다는데 십중팔구 북아프리카 아랍 애들의 집요한 추행일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걔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나고 자라 교육을 받는데도 프렌치들은 거의 안 하는 행동인데, 정말 졸졸 따라다니면서 전화번호를 달라느니, 사귀자면서 만지고 추근댄다. 멀리서 보면 연인 같아 보이기도 하는 행위에 외면해 버리지만 알고 보면 추행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 여자들을 구해 준 적이 많았지만 고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파리를 여행하는 한국인 여행객들도 소매치기로부터 구해주었지만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썬글라스를 끼고 따뜻한 태양 아래, 유유자적 걷는 내 모습에서 젊어한 때, 예의와 객기가 동시에 넘치던 모습을 볼 수도 없는 그저 파리 생활에 익숙한 한 나그네의 모습의 모습으로 거리를 다녔다. 파리의 거리를 속속들이 알고 즐긴다는 것은 이방인으로써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다.


 파리지엔느들은 대부분 친절하다. 

아름다운 미소와 친절이 몸에 배어 있어 대화가 통한다면 언제든지 커피 한 잔 정도는 가볍게 마셔줄만큼 여유도 있다. 그런 배려 때문일까,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들이 건네는 미소는 아름답기만 하고 관심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괜한 오해를 주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불고 있는 성추행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한국은 여성에게 다가서려면 우선, 온 몸을 스캔 당해야하며 호감, 비호감이 얼굴에서 당장 나타나 더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당장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파리지엔느들에게선 사람에 대한 편견 없이 친절하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걸 내세워 약자로서 혜택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진짜 평등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성추행에 반대해 들고 일어났으니 구구절절 공감이 간다.


 카페에 앉아, 알롱제 커피(아메리칸) 한 잔 주문하면 물 한잔을 따로 주는데, 처음엔 몰랐다가 이제 보니, 목이 그렇게 마르더라! 옛날엔 왜 몰랐을까…… 커피 한 잔은 공공 화장실이 적은 파리에서 급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테라스에서의 커피는 여유이자 낭만이었는데 물 한잔이 나오는 이유를 몰랐었다. 또한 컵이 왜 그렇게 얼룩이 져 더러워 보이는지도 몰랐다.

 

 웨이터는 웨이터일 뿐, 컵은 기계가 청소하고 불만 있으면 마시지 말던가, 탓하려면 기계에게 딴지를 걸라는 건가? 더러는 무뚝뚝하고 더러는 불친절하기까지 한 웨이터들이 자신의 서비스에 미소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역설하며 오히려 손님들이 웨이터들에게 감미로운 불어로 즐거운 언어의 유희로 귀를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허름한 카페는 그렇게 깨끗해보이지 않고 어린 학생들이 알바로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분주한 모습도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파리는 전문 직업군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파리 11구 벨빌 역 근처, 차이나타운의 카페



 불편함,

 파리는 내가 몸을 움직여야 먹을꺼리를 획득할 수 있다. 게으른 사람에겐 죽어도 살 수 없는 곳이지만 한국인들 시각으론 온통 게으른 사람들 천국이다. 첨단을 사는 사람들에게 ‘너는 몸을 움직여, 너의 돈으로 생필품을 사라’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한국은 서비스가 만연화 되어 오히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을로써 을의 삶을 사는 시스템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고시원 인간 닭장 안에서 전화 한 통화로,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한 서비스를 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비스가 아니라 서로를 갉아먹는 생존의 먹이사슬에서 돈을 가진 자의 횡포, 갑질이지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쓰레기 서비스다.


 노동의 가치가 포함되지 않은 서비스는 인간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서 찾아오게 만드는 파리는 오만해 보이기도 하고 거기에 더해 장사할 생각이 없어보일만큼, 자신의 퇴근시간과 퇴근 후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파리에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배달 시스템이 정착화 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의 가치인 인건비가 높기 때문이고 그래서 파리지앙들은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할 줄 안다. 첨단의 시대에 그렇게 그들은 당연하게 자신이 일을 하고 인건비가 높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다. 

 

 파리는 생활먼지가 장난 아닌데 이전엔 왜 몰랐을까……


 파리 지하철에도 먼지 냄새가 장난 아닌데 청소는 왜 안 하는 걸까? 거리엔 물청소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줄 알았더니 물청소 기계와 청소부들이 보였다. 이들의 일 실력은 형편 없다 못해 저래도 월급 받을 수 있을까 수준인데도 굴러간다. 보고 있으면 한국 사람들이 일하는 수준과 강도가 어이없을 정도다. 파리를 떠나 있었던 8년 전에 나는 파리 예찬론자였다.

 

 그런데 이게 뭔가?!

 

 떠나 있는 동안 내 의식이 심각하게 변했음을 느꼈다. 잠깐씩 다녀오는 한국에서 느꼈던 한국에 대한 비애는, 파리를 8년 만에 찾고서야 새로운 시각을 얻은 것이다. 파리는 지저분하고 게으르고 느리다. 건물들은 낡고 불편하지만 뭔가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테라스에 내 놓은 형형색색의 꽃과 에어컨 실외기 하난 없이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는 건축양식으로 쌓아 올린 멋진 건축물 테라스에서 무심코 사람들이 나를 바라 볼 것 같다. 그렇게 파리는 조각같은 건축물과 조그만 미니어쳐 같은 거리로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내 시각의 변화가 온 이유가 무었일까?

 

 파리 5구 보훈처에서 볼일을 보고 나는 어느새, 뤽상부르그 공원의 초입에 들어섰다. 국가 보훈처(ONACVG)에서 지척이었다. 공원 입구를 천천히 들어갔다. 숲이었을 공원의 나무는 깍두기처럼 깎여 일렬로 늘어선 군인처럼 반듯했다. 높고 큰 나무들이 만들어 낸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마에 떼도 안 벗겨진 발랑 까진 애들, 나이와 인생을 구분하기 힘든 모습의 사람들, 손을 맞잡은 노부부, 연인과 친구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평일인데도 가득하게 공원의 그늘을 채웠다.


 광합성을 위해 민감한 곳만 가린 남녀의 모습이 민망했다. 나이 서른, 젊었을 때의 성적인 문화의 충격이 관람의 즐거움으로 변모했지만 눈 둘 곳 없던 민망함이 썬글이 대신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노소를 떠난 그들의 행위에 아무런 감정이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다. 



천문대 분수대. 천문대에서 룩상부르그 정원으로 들어가는 ‘위대한 탐험가 정원’ 초입에 있다. 카르포의 <지구를 지탱하는 네 대륙>


 그러나,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듯, 두 손을 꼭 잡은 늙은 연인들을 볼 때면 경외감이 들었다. 행여, 놓칠래라 팔짱을 끼는 모습에서 사랑이 무르익어 숙성된 진짜 사랑의 모습, 나는 한국에서 볼 수 없던 광경을 프랑스의 노르망디, 르와르 고성지대, 파리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다. 혼자, 쓸쓸하게 찾은 뤽상부르그 공원의 늙은 딴게이, 썬글이 벗겨질까 자주 확인하며 헤벌레 걷는 햇빛에 취한 하루, 먼지에 뒤덮였다


 뤽상부르그 정원으로 들어가니 도시의 소음이 일순간 사라진다. 바람이 쓸고 가는 먼지에 몸을 피하는 사람들이나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나 앉을 곳을 찾는다. 군인처럼 깎아 놓은 각진 나무 그늘 아래, 벤치와 초록색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크다란 나무 아래, 나무와 조화롭게 차려진 조그만 상점엔 커피와 빵,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다. 나는 의자 두 개를 집어 궁전 조망이 좋은 곳으로 향한다. 양말까지 벗어 의자 위에 발을 올려 놓고 궁전과 꽃, 사람들을 구경한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바람에 부대끼는 나무 아래, 잠깐 눈을 감아본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볼을 쓰다듬으며 먼지를 잔뜩 묻히고 도망간다.


 구름 한 점 없이 찬란한 햇빛을 가득 받은 정원에는 신화 속 아름다운 조각이 즐비하다. 프랑스의 왕비들, 귀족의 부인들, 문인과 예술가들의 동상을 찾아 다니는 재미도 있다. 세계사나 문학 책에서 배우는 보들레르, 죠르주상드, 모파상, 스탕달, 들라크로와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궁전을 만든 마리 드 메디치의 전신 동상도 있다. 마리드메디치에 의해 지어진 전형적인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회색 대리석이 노을에 비치면 황금색으로 변하는 황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궁전은 지금 상원의원 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변에 소르본 대학과 본초자오선이 지나는 천문대, 다빈치 코드의 그 성당, 생 쉴피스, 팡테옹 아사스 파리 2대학, 클루니 중세 박물관 등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서 움직이는 곳이다. 모르면 지나칠 수 있는 거리와 건물들이 아무 의미 없다가도 알고 나면 위대해지는 그 이름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단연, 이 건물을 지은 마리드메디치다!


파리에 가면 이렇게 손을 꼭 맞잡거나 팔짱을 끼고 걷는 노부부를 만난다. 그 모습은 프랑스 곳곳에서 볼 수 있고 아름다운 인생이란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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