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ssoud Jun Jan 27. 2020

겨울 설악산 1, 2020년 1월 17

폭설이 내린 설악산


 폭설이 내린 설악산


 갑자기 생긴 시간 덕분에 인천 송도에 생긴 프랑스 스포츠 전문 업체 데카틀론에서 등산 장비를 구입하고 병원장인 친구와 점심을 먹고 곧장 종로 3가에서 지인들을 만났다. 알제리 현대엔지니어링 복합화력 발전소에서 같이 일했던 추억을 간직한 옛 동료들과 즐거운 저녁을 먹고, 고향 친구가 총괄 매니저로 있는 호텔에 주차를 하고 막차를 타고 속초의 밤바람을 맞이했다. 마음 한구석에 가스버너와 아이젠을 구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겨울의 눈 덮인 산을 보겠다는 마음이, 만사 제쳐놓고 설악산이 있는 속초로 나를 불렀다.


 산에서 1박을 하지 않겠다는 계획은 일찍 일어나 곧장 산으로 향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아이젠과 버너를 사야만 했다. 스포츠 용품점 데카트론은 통관 문제로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등반 전문가용 아이젠과 버너마저도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값싸고 품질 좋은 옷들은 사이즈가 맞는 게 없을 정도로 진열대가 빈약했다. 그러나, 볼품없이 등산화 위에 덧씌우는 아이젠을 사고 싶지 않았고 버너는 없더라도 다른 등산객들에게 빌리면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설악산 소공원에 들어가서도 고작, 신는 아이젠도 아닌 4개의 박음질만 되어 있는 만 원짜리를 구입하고서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아무리 한 번 사용하고 말지라도 폭설이 내렸다는 산에서, 등산화 가운데만 살짝 솟아있는 아이젠을 미덥지 못하게 바라보았다. 미덥지 못한 마음은 오전 10시가 될 때까지도 다른 곳에 살 만한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렸지만 너무 늦어 대청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 버스가 서울로 가는 7시 15분까진 오색에 도착해야 했다.


 설악산 소공원 들어가는 입구 한편에 신흥사 입장료를 본 것 같았다. 한가한 사찰 기념품을 사는 가게 안을 둘러보고 그냥 나가기 민망해서 사찰에서 먹는다는 빵을 사서 배낭에 쑤셔 넣었다. 설악산은 세 번째 방문이었다. 한국에 한 번씩 들어올 때, 지리산만 다니다가 설악산을 가보자고 와서, 중청에서 하루 자고 공룡능선을 따라 돌아왔고 두 번째는 백담사를 따라 소공원으로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산행이 통제되어 울산바위만 올라간 적이 있었다. 겨울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눈이 내리지 않았음 어쩌나 하는 걱정은 없었다. 며칠 전 뉴스에서 설악산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폭설이 내렸다는데 아직 눈이 보이지 않았다. 오보인가?


 탐방로가 폐쇄되었을 염려도 하지 않았다. 바로 오늘부터 모든 탐방로가 오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 계획했던 오색에서 설악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오색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젠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루트를 변경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소공원 내의 매점들이 대개 철거되어버렸던 탓이었다. 

 

 조금 올라가자 만나는 비선대는 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파악한 정보에는 2017년에 철거되었다는 소식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비선대의 비경을 자랑하는 수많은 글들을 보았으나 나는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작고 소담스러운 계곡과 기암절벽이 얕고 단조로웠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몽블랑을 하이킹으로 오르는 ‘빙하의 바다(Mer de Glace)’를 기차로 타고 오르는 ‘몽땅베르(Montenvers)에서 보는 절경의 100배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스 몽블랑 뒤편의 빙해와 정면 그림자 부분이 알프스 3대 북벽 중에 하나인 그랑조라스

 '빙하의 바다'는 시야에서 보이는 길이가 7km에 달했고 500미터의 폭 양편으로 3500미터 높이의 교회 첨탑 같은 산봉우리 아래 200미터 깊이의 만년설이 바다처럼 넓었다. 그 산에서 떨어지는 바위의 울림이 그 넓은 골짜기를 밤새 울렸다. 그 울림은 마치, 거인의 발자국 소리처럼 웅장했으나 비선대는 작고 아담한 소녀의 치맛자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곡의 얼음물이 얼음을 뚫고 청명한 소리를 내며 바람소리와 어울렸다. 하산을 하는 등산객에게,


“비선대에 매점이 있었는데 아직 멀었나요?”


 천연덕스럽게 물었더니 ‘없어진 지 오래됐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흔적 없이 깔끔하게 치웠기 때문에 삼거리처럼 갈리는 길이 아니었으면 의식하지도 못했을 게 뻔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눈의 흔적이 그다지 없는 양폭 대피소가 나타나자 그냥 스쳤다. 바쁜 걸음으로 희운각 대피소까지 단숨에 올라가서 아이젠을 파는지 물어보자 이미 구입한 네 개짜리 밖에 없었다. 낙엽에 덮여 있던 얼음길을 디디며 몇 번 엉덩방아를 찧었다. 혼자 재밌다고 깔깔거리다가 낙엽에 덮인 빙판 위가 폭이 작았음에도 터무니없이 미끄러진 것을 깨달았다. 

설원에서 신던 멋진 아이젠


 다행히 그런 빙판 길은 더 이상 없었다. 소청을 오르는 길이 가팔랐다. 예상대로 아이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하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스틱을 힘주어 잡고 뒤를 지원하며 올라가는 길이 더뎠다. 하산을 하는 사람들이 쌩쌩 지나가며 끙끙거리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등산화에 끼워 신는 아이젠의 부재를 부러워하면서도 어차피 한번 쓰고 버릴 거 아쉽지 않았다. 느렸지만 높지 않았던 덕에 금방 소청 갈림길에 도착했다. 오후 네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대청분소를 100여 미터 남겨놓고 갑자기 눈 덮인 백담사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대피소에서 자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오색으로 갈 것인지, 백담사로 내려갈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미련 없이 백담사를 향해 돌아섰다.


 하산 길 아이젠은 더더욱 말을 듣지 않았다. 신나게 썰매를 타고 혼자 환호 작약하며 아이처럼 즐거웠다. 금방 소청 대피소가 나타났다. 대피소 디지털시계가 네 시 반을 가리켰다. 두 번째 설악산행 때, 용대리에 거주하는 소청 직원과 기분 좋은 인연이 있었다. 막차를 타고 무작정 도착했던 길에 머물렀던 펜션이 직원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그날 처음으로 대청분소에서 잠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눈이 없어 실망했던 기억이 있었지만 관리 직원과 아무런 문제 없이 하루를 넘긴 날을 기념하기도 했었다.


2011년 공룡능선

 대피소 예약은 당일에도 넉넉했다. 그럼에도 대피소 예약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차라리 봉정암에서 불자를 빙자해 하루 잠을 청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절에서 주는 비빔밥을 그냥 주는 줄도 모르고 남들은 먹는데 나는 그냥 지나쳤던 기억은 정보력 부족 때문이었다. 절 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었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 속엔 불자도 아니면서 얻어먹는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봉정암 보살들이 중생의 하룻밤 청을 거절할 리가 없었고 나는 삔데라는 오지랖에 익숙해져 있었다. 더욱이 산속의 절도, 기도를 핑계로 돈을 내고서도 사람 사는 냄새를 풍겼다. 관리공단 직원들의 완장이 가하는 재수 없는 언행과 통제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러나,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생긴 이래로 대피소 관리직원들을 만나는 건 고역이었다. 민간인들이 운영할 때는 시끄럽고 장터의 분위기를 풍겨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 정겨웠다. 그러나 1997년 지리산에서 있었던 일을 시발점으로 지리산을 찾지 않게 되었고 어느 여름에 한번 설악산을 오르곤 먼 바램이 되었다. 눈 덮인 산을 필히 오르겠다는 마음 한편에,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직원들을 피해 다녀야 한다는 서글픔이 산을 찾지 않는 이유가 되는 것은 큰 비극이란 생각이 들었다.

 


*** 알프스 몽블랑과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알프스 산맥에서 전투 훈련을 받고 산악 연대 휘장을 받는 것도 웃긴 일이었는데, 몽블랑을 혼자 등반하면서 눈 속에 감춰진 크레바스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억 뒤편에, 몽블랑 곳곳의 대피소엔 관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산엔 쓰레기가 없었고 대피소엔 등산객들 스스로가 이불을 개고 정리하여 뒤에 올 사람들의 불편함이 없게 모든 것이 개인의 역량에 맡겼다. 샤모니 몽블랑 시내에서 눈 앞에 보이는 만년설의 장관은 사람들에게 가벼운 장비로도 오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했고 그렇게 업신여기며 오르다 조난을 당하거나 빙벽의 객이 되는 일이 흔했다.


 에귀드미디로 올라가는 12km의 빙하의 바다를 지나 만나는 거대한 크레바스들은 눈 속에 숨어 있다가 순식간에 등산객들을 집어삼켰다. 그러한 재난의 경험으로도 매년 용기 있는 등반객들의 목숨을 앗아간 알프스에는 대피소에 관리공단 직원을 두어 안전을 책임지거나, 안전을 핑계로 사람들의 자유롭고 한가로운 산행에 몇 마디 말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외인부대 알프스 산악 전투 훈련


 전문 산악 학교에서 가이드 자격증을 딴 가이드들의 면면은 더더욱 신뢰가 갔다. 그들은 ‘하지 마라’라는 명령 대신에, 어떻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도 가르쳐 줬는데도 왜 하느냐는 개소리는 하지 않았다. 산에서의 금지사항은 스스로도 알 수 있기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없었다. 그만큼 알프스를 찾는 사람들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법을 알았고, 몰랐다 한들 다시 시범을 보이는 여유가 있었다. 등산객의 위험한 행동을 본 가이드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지배하지도 금지하지도 않으면서 리드하는 가이드의 모습은 외인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외인부대는 너무나 유명했지만 팀장도 소대장도 중대장도 대원들에게 어떠한 금지령이나 명령으로 대원들을 대하는 일이 없었다. 모든 개인의 역량을 믿었고 대원들은 사고 없이 모든 훈련들을 소화해내면서 상호 간의 연대감이 저절로 생겨났다. 계급이 높을수록 리드를 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무한한 신뢰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 이후, 20년이 지나 한국에 들어와서 경험한 관리공단 직원들의 언행은 등반객인 나를 바보 취급하거나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은, 그들이 뒷수습을 해야 할 일이 귀찮기 때문이지 개인의 안전이나 즐거운 산행과는 전혀 무관했다. 한국의 관리자들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완장질에 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 너무 많았다.




 자연보호와 생태계 보전을 목적으로 공원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불법 단속과 청소, 공원관리, 고객만족과 수익금 징수와 관리, 탐방객 안전관리에 이르기까지 7개 부처와 감사실을 포함한 6개의 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산행을 하면 대피소에서 만나는 직원들은 대부분 공단 직원들 중에 신청을 받아서 뽑는다고 했다. 문제는 그들의 자질에 있었다. 특수 근무직이라 지상보다 급여가 많아도 산악 구조 관련 교육은 받는지, 자격은 있는지, 사람들 대하는 방법은 아는지 궁금할 정도로 언행에 문제가 많았다. 그 언행이 완장질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등산객들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 


 사회에 찌든 인생을 산에 힐링하러 왔다가 국립공원 직원 때문에 기분 잡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작가의 이전글 몽마르뜨 언덕의 소매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