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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Jan 29. 2020

겨울 지리산 1, 1월 22일

2020년 1월 22


*** 설악산에선 새해 첫 소원을 이뤘지만......



“정상엔 눈이 내리나요?”


 직원이 아침엔 비가 내리다가 눈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간간히 비가 내렸다. 중산리 탐방 지원센터의 여직원이 장터목 대피소를 예약하기 위해서는 오후 두시까지 게이트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로타리 산장까지는 세시까지 통과해야 한다며 예약이 되어 있는지 물었다. 로터리 대피소에 예약만 해두었지 돈이 빠져나가진 않은 상태여서 지불 방법을 묻자, 대피소 예약 사이트에서 이체를 해야 완료가 된다고 말했다.

 

 법계사에 전화를 걸어 예약이 가능하냐고 묻자, 등산객은 받지 않지만 기도를 하러 올라오는 불자들에게 방을 준다고 말해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장터목 대피소로 예약했다. 그러는 사이 오후 두 시를 넘겼다. 대피소 주차장엔 설 연휴를 산에서 보내려는 등산객들의 차량이 간간히 세워져 있었다. 담배를 물고 화장실을 가려다 직원이 ‘담배 끄라’는 말에 ‘앗 들켜버렸네’하곤 담배를 껐다. 공단 직원들은 담배가 상대의 인격을 판단하는 수단인지, 산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하는 '담배 끄세요!'란 한마디에 실을 수 있는 모든 권위를 실어 명령했다.


 여직원에서 남자 직원들로 바뀐 관리소 직원은 두 시가 넘었기 때문에 장터목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소?’ 하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허가 되지 않았다. 물론, 이 길목을 피해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많았다. 몰래, 법계사까지 올라가 잠을 청해보려다 로터리 산장엔 아무도 예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피소 예약 도중 확인을 했던 터라 대피소 변경 요청을 했다. 그러자 상호간 확인을 하고서야 오를 수 있다고 허락했다.


[에이씨! 다음엔 필히 나이롱 불자로라도 개종해야겠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산길엔 비가 계속 흩날렸다. 이런 고독한 산길이 좋았다.

설악산을 내려온 후, 다시 인천 송도 데카트론으로 가서 산, 등산화에 끼워 신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스틱 재질과 같은 재료를 쓴 아이젠은 아주 짧게 나온 바닥 면이 제대로 기능할지 의아할 정도였기 때문에 새로 산 기능성 비옷의 성능도 확인해 봐야했다. 프랑스의 데카트론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빙벽용 아이젠과 피켈, 설피도 송도의 데카트론에선 살 수 없었다. 


 한국의 안전 시스템 문제로 통관이 허가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사실, 한국의 산 어디든 빙벽 등반을 해야 할 일이 아니면 빙벽용 아이젠도 필요 없고 있다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에 일반 등산객들이 엄두도 못 낼게 뻔했다. 또한 빙벽용 아이젠을 한번이라도 사용하고 나면 일반 아이젠은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버너는 차 뒷 트렁크에 곱게 떨어져 있었다.


로터리 산장에 다 왔음을 알리는 넓은 터



 로터리 산장까지 정확히 두 시간 소요됐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였던가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오지 않았던 지리산이었다. 오더라도 가급적 가장 단거리로 오를 수 있는 법계사 코스보다 등반이 가장 쉬운 내대에서 세석평원을 지나 천왕봉으로 거쳐 대원사로 내려오거나 아니면 반대편으로 화엄사를 향하는 당일 코스로 왔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잊었는지도 몰랐다. 


 오래 된 기억 속엔 무릎이상으로 의도치 않았던 야간산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무서울 것 같던 홀로 걷는 야간 산행이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주는 대신에 중산리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길이 더 무서웠다. 그러한 공포의 경험은 내대리의 민박 촌을 향하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도 없이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르고 머리카락이 곤두섰던 경험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반면에, 프랑스의 산에서는 그러한 공포를 경험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단지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앞에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겸허함이 마음을 지배하면서 저 멀리 곰을 보거나 산양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아무리 완벽한 장비를 갖추어도 시시때때로 눈 속에 파묻힌 크레바스를 만나면 그 알 수 없는 깊이와 진행되는 방향, 건너야 하는 폭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눈 앞에 펼쳐진 현실적인 공포였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금방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땀이 온몸을 적셨다.

 

 실질적인 공포는 또 있었다. 고산병이었다. 외인 부대에서 산악전투 연대에서 수행한 훈련은 고산지대라도 모든 안전이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떠한 고산 증세도 느끼지 못했지만, 혼자 몽블랑을 올랐을 때, 텐트 속에서 옷을 발가벗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사경을 헤맬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 적당한 높이의 만년설로 뒤 덮인 몽블랑은 누구나 쉽게 넘볼 만큼 가까워 만만해 보였고 만년설의 하얀 눈은 눈사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음에도 수시로 눈사태가 일어났다.


 눈사태는 샤모니에 사는 사람들도 자주 목격하는 광경이 장관이었지만 그 속에선 멋모르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따라서 눈사태의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곳을 ‘고산 등반 안내소’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 모든 위험에도 고산 전문 가이드를 고용해도 눈사태의 위험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젊은 나이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용기는 전문 정보 없이 고산지대를 등반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잘 알 수 있는 경험이었다.


빙벽용 아이젠. 알프스 겨울산엔 설피도 필수다.

 그러나 한국의 산에서 그러한 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겨울만 제외하면 운동화를 신고 올라도 될 만큼 가깝고 정겨워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관리공단이 생기고선 오래 된 기억 속의 군중들을 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피해 주말을 피해 산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기엔 혼자 다니는 게 편했기 때문이었다.

 

 고 2때 첫 산이었던 지리산은 20세가 되던 해에 88올림픽 복싱 4차 선발전을 위해 3개월간 혹독한 훈련을 했던 장소였다. 그 때 장터목에서 3개월을 머물며 종주 왕복과 하산과 등산을 매일같이 다른 코스로 하던 곳이었다. 그 때 장터목에서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과 산에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 비구니가 되겠다던 홍익대 미대 여자와 각 산장의 사람들은 나를 ‘지리산 빠꿈이’라고 부르곤 했다. 순박한 20세 청년은 그때, 칠선계곡만 제외하면 지리산 곳곳에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로타리 산장에 짐을 던져두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법계사에 올라 3층 석탑 보물과 사리탑을 보았다. 흩날리는 비에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사찰이라는 명성답게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잡아 비구름에 가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식수를 받는 곳에서 물을 마시고 내려오자 불이 켜진 곳에 기와장에 이름을 새긴다는 광고와 아이젠을 판다고 적혀 있었다. 옆을 지나가던 비구니가 ‘뭐 필요하세요?’하고 물었다. 얼떨결에 어떤 아이젠을 파는지 한 번 봐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방에 있던 보살을 불러 냈다.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반갑게 나온 보살은 개의치 않고 등산화에 신는 아이젠이라고 말해주었다. 설악산에서 볼 수 없던 것이 지리산엔 있었구나…… 그러나 나도 성능이 증명되지 않은 신뢰할만한 아이젠을 가지고 있었다. 가격도 싸서 일반 등산점에서 얼마나 후려치는지 대한민국 가장 높은 사찰의 '아이젠 판매' 글귀가 고마웠다.


몽블랑을 오르는 사람들이 신는 아이젠

 그러나 기능성 비옷은 2시간 만에 거의 젖었을 정도였음에도 땀인지 비인지 모를 정도로 그 성능을 가늠할 수 없었고 아이젠은 성능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까 숙박 문의했을 때, 왜 안 된다고 그러신 겁니까?”

“등산객들은 받지 않아요. 또 바로 밑에 대피소도 있는데, 우리는 불자 아니면 안돼요!”

“아, 나중에는 불자로 기도하러 와야겠네요~ 감사해요”



 대피소엔 혼자였다. 혼자 독방을 쓴다고 좋아했지만 기대했던 눈은 내리지 않았다. 오전에 내리던 눈이 비로 변했던 것이다. 밤새 빗줄기가 거세어졌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대피소 뒤편으로 절에서 비치는 불빛이 세상을 비추는 빛처럼 밝고 환했다. 저녁을 코스트코에서 산 살라미와 맥주로 채우고 빗소리에 잠을 뒤척이다 늦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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