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시인 중에 가장 먼저 안 사람은 ‘고엽’을 쓴 자끄 프레베르(Jacques Prévert)다. 이브 몽땅이 부른 노래의 애절함이 그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내 인생에 별로 연관이 없을 것 같던 프랑스어를 고등학교 때 배우며 이 괴상한 언어의 존재가 인생 에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프렌치처럼 곱슬머리에 멋졌던 담임, 불어 선생님이 어떤 수업을 했는지, 행여, 프랑스 시 한 수 정도는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28세에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외인 부대에서 자끄 프레베르의 시를 접하곤 달달 외워 동료들에게 읊어주곤 했다. 그러면, 프랑스 동료들은 그 시를 한국인이 원어로 왼다는 것을 신기하고 기특해 했다. 왜냐하면, 프랑스인들은 노래 가사마저도 외우지 못하는데 외국인이 외운다는 것을 신기해 했다. 그러나, 잊혀진 기억 저편에, 고엽보다 먼저 알고 있는 시가 있었으니 바로 ‘미라보 다리 아래’였다. 병영이 있던 님므에서 800km를 떼제베로 달려 일부러 미라보를 보러 갔다. 물론, 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무것도 모른 체, 프랑스 동료들이 학교에서 배웠을 그 시에 대한 배경을 설명을 해줄 때,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도 마냥 좋았던 시였다.
젊어 한때, 가난했지만 고운 심성의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아래’는 고엽과 더불어 최애하는 시가 되어 내 마음에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 시는 간략한 운율과 더불어 사랑을 잃어 상심한 남자의 애끓는 심정을 표현해 숱한 여심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는 특히, 여성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슴을 황홀하게 하는 애잔함이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때 문학에 심취했던 사람들에게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또 시로 각광받았다. 그 시로 인해 프랑스의 상징이 된 미라보 다리. 그래서, 아마도 60대 이후 세대는 프랑스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문학적이며 정신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름 또한 고상하지 않은가! 귀욤 아폴리네르라니!
마리 로랑생 작, '작가 친구들'. 왼쪽 까만 친구가 피카소, 한가운데가 아폴리네르, 붉은 꽃을 들고 있는 여성이 로랑생, 오른쪽 구석의 여성은 피카소의 애인 페르단도 올리비에
아폴리네르의 본명은 아주 길다. 머리 아플 테니 아는 것만 알자. 폴란드 출신 어머니와 이탈리아 장교인 아버지 ‘프란체스코 아스페르몽(Francesco Flugi d’Aspermont)’ 사이에서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던 관계로 만 스무살이 되던 해 파리로 와 당시 ‘문화 예술 센터’에 정착한다. 불안정한 생활 속에 속기사 자격증을 따고 은행에 취직, 변호사 에스나르의 대필 작가로 ‘르 마르땅’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기 위해 1개월간 고용되어 수당을 받지 못했다. 변호사의 애인을 꼬신 보복으로.
아폴리네르는 그 이전에 ‘애니 플래이든’이라는 영국 여자에게 사랑에 빠졌지만 거부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국으로 가버리고 혼자 남게 되자, 주체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며 쓴 ‘사랑 받지 못한 남자의 노래’라는 시가 유명세를 탔고 27세 되던 1907년, 피카소를 비롯한 샤갈 등, 몽마르뜨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유명한 화가들과 문학가들의 집 세탁선(당시 센느 강에서 빨래를 해주던 배)을 드나들면서 유대관계를 늘려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피카소의 소개로 운명의 여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을 만났다. 하얀 거품을 물고 거센 바람을 동반한 혼돈의 바다 앞에 선 듯, ‘미라보 다리 아래’를 쓰게 만든 7년간의 사랑!
그들은 가난했다.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은 격렬했고 위태로웠으며 그럴수록 사랑이 깊어졌다. 그들의 미래는 가난으로 인해 불투명해지면서 집착 같기도 했고 운명 같았다. 파리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숱한 소문 속에서 작품 속에 서로의 모습을 담으며 우정 같기도 했다. 마치 오랫동안 부부였던 것처럼 권태를 느끼기도 했으나, 오래 된 세계인들의 도시 파리는 세계인들의 인종 전시장 같은 다양성 속에 항상 신선함이 유지됐다.
그러한 다양성은 시인이면서 수필을 쓰고, 은행원이기도 하며 때론 신문에 기고를 하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만나는 문학과 화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인상파로 넘어오면서 산업화 되는 역동적인 삶, 격동적인 환경 속에서도 격의 없이 누구든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시대를 주도하는 작가들 속에서 자신도 초현실주의라는 단어도 만들었다. 마리 로랑생은 아방가르드 예술 세계를 접했으니 문화 예술을 주도하는 파리의 글로벌화에서 기인했다. 그들은 각자 다른 분야에서 서로서로 예술에 영감을 주면서.
그들의 결혼은 양가 어머니들 사이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몽마르뜨에서 태어나 주변환경에서 주로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란 로랑생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조치로 몽마르트를 떠나 미라보 다리가 근처에 있는 곳으로 이사를 떠나자 몇 개월 후, 아폴리네르도 도보로 5분 거리로 이사를 가며 인위적으로 갈라 놓을 수 없는 사랑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니, 아폴리네르에게 세계사에 기록에 남은 사건이 들이 닥쳤다.
*** 모나리자 도난 사건과 아폴리네르
1913년 12월 13일, 모나리자를 되찾았다는 Le Petit Parisien의 신문기사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가 도난 당했다.
그림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아폴리네르였다. 모나리자 도난 사건 후, 루브르 박물관의 어떤 청소부 한 명이 어떤 작품을 훔쳐 아폴리네르를 찾아 와 작품 감정을 의뢰하자 도둑을 호통치고 내쫓았다. 신고가 두려워 그림을 놔두고 도둑이 도망가자, 그림을 들고 새로 바뀐 루브르 박물관장을 찾아 가는데, 박물관장은 아폴리네르를 도둑으로 오인해서 경찰에 신고, 일주일간 감금됨과 동시에, 가택수색과 주변 탐문에 이어 피카소까지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되는 가여운 아폴리네르......
개성이 강했지만 연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마리 로장생'이 찾아와 그의 무능과 도둑질을, 한치의 의문도 없이 질타하며 그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난 그는, 노트르담 성당 건너편, 생미셸 광장의 옥탑 방에 아뜰리에를 꾸리고 있던 친구 샤갈에게 찾아가 신세를 한탄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해가 뜰 무렵 집으로 돌아가려고 센느 강 좌 안을 타고 그르넬 다리까지 와서 건너던 중이었다.
떠 오르는 햇살을 받은 센느강의 물보라가 눈부시고 자신이 너무 초라한 자신을 돌아보았다. 모나리자 도둑으로 오인 받은 사실, 소중한 친구들이 연루되어 명예가 실추한 사실, 애인으로부터 버림 받았고 숱한 친구들로부터 도둑의 멍에를 져야만 했던 현실이 한탄스러웠던 그의 마음은 술에 취해 혼란한 마음으로 미라보 다리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를 바라보았다. 태양을 받은 센느 강 물결이 눈부시게 빛나 바라보기에도 황홀한 풍경 속에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Et nos amours
Faut-il qu'il m'en souvienne
La joie venait toujours après la p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네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상기하며
밤이 오고 시간이 울리고 세월은 가지만
나는 남았네
Les mains dans les mains restons face à face
Tandis que sous
Le pont de nos bras passe
Des éternels regards l'onde si lasse
손에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보고 서자
마주 잡은 팔 아래로
영원을 바라보기에도 지친 강물이 흘러가더라도
후렴: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L'amour s'en va comme cette eau courante
L'amour s'en va
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
사랑은 이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지나가고
세월도 떠나가네 삶이 느린 것처럼, 희망이 격렬한 것처럼
후렴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Ni temps passé
Ni les amours reviennent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도
흐르는 시간과 떠난 사랑은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 강은 흐르네.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미라보 다리 위에서 바라본 에펠탑, 그 앞의 백조의 섬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보는 오리지날 작품
로랑생이 떠난 1년 뒤, 그는 이 시를 발표했다. 희망에 대한 불성실함과 필연적인 결별이 기쁨은 항상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진리. 그러나 모나리자는 1913년 루브르 박물관의 이탈리아 출신의 창문 청소부인 빈센죠가 훔쳐 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게 유명세를 탄 모나리자는 세상에 알려졌다. 마리 로랑생은 독일인 오토와 결혼하여 완전히 아폴리네르를 떠났다.
마리 로랑생과 헤어진 2년 후, 프랑스 국적이 없던 그는 프랑스 군 입대를 거절당하고 니스로 가서 국적을 신청하기에 이르고 이혼녀 루이즈 콜리니 샤티용을 만나 첫 눈에 반한다.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 아폴리네르는 수많은 프랑스인의 가슴에 도둑으로서의 혐의에서 벗어나고 동정론에 힘입어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물론, 아폴리네르를 버린 마리 로장생은 고무신 바꿔 신은 여자의 비애를 느끼며 쓸쓸히 살다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손엔 꽃다발을 품고 다른 한 손엔 아폴리네르의 연애편지를 품고 죽어갔다나 뭐라나……
하여튼 시 '미라보 다리'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각광 받고 있지만 처음 다리를 보고 느낄 감정은 그저 '에게 이게 뭐야!' 하며 실망할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면 아폴리네르의 그 감정을 만날 수 있으리라.
시는 감미롭고 애달픈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그저 물 흐르듯 세월의 덧없음과 사랑의 불확실성이 푸념처럼 가만히 녹아 있는 이 시에 크다란 애절함도 간절함도 가득하지만 이 시가 쓰여진 사연과 아폴리네를 알면 사랑을 잃은 사람들의 가슴에 멍울지듯 각인되는 마력을 가진다. 그래서 가만히 전해지는 그 애절한 사연에 너도나도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를 입에 붙여 숱한 처녀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와 에펠탑
미라보 다리는 파리 15구와 16구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교장 아치 형식으로 폭 20미터, 길이 173미터로 에펠 탑을 설계했던 에펠의 조그만 오리지널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백조의 섬(Ile de Signes)과 연결된 그르넬 다리와 마주하고 있는 연두색 교각이다. 철골 구조물의 신개념의 건축 후에 파리의 교각 건설에도 혁명을 몰고 와 미라보 다리를 비롯한 오스테를리츠 다리, 비르 하케임 다리와 더불어 목재와 접목한 예술의 다리와 특히 알렉산더 3세 다리에도 접목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미라보 다리에는 프랑스의 상징인 프랑코 족이 무기를 든 여신상과 해상 운수업을 상징하는 동상, 상선의 뱃머리를 상징하는 동상, 배 후미를 상징하는 네 개의 동상과 각각의 교각마다 파리 시를 상징하는 문장들로 이뤄져 있고 미라보는 프랑스 대혁명 때 등장하는 사람 이름이다.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삼부회의에 3신분 대표들을 기억할 것이다. 1신분은 성직자였고 2신분은 귀족 3신분이 평민이었다. 1789년 5월의 삼부회의에 평민대표로 참석했던 훗날의 부르조아를 상징하는 사람들의 대표였던 사람이 바로 미라보였다.
이제 파리의 마음이자 낭만의 상징인 미라보 다리와 아폴리네르를 알게 되었으니 초록색으로 단장된 마라보 다리위에 서보자.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마주보며 서있는 파리의 자유의 여신상과 에펠탑... 그리고 종교전쟁의 희생으로 죽어간 수 없는 희생자들과 마녀사냥으로 화형 당한 이들의 영혼이 깃든 백조의 길을 산책하며 파리답지 않은 파리에서 파리의 자유와 낭만을 만끽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