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성숙을 위한 지침서
미국 일리노이(Illinois) 주에 위치한 시카고는 4월 중순까지도 눈이 온다. 심각한 폭설은 주로 1월에서 2월 사이에 많이 오는데 심할 때는 허벅지를 손쉽게 덮을 정도로 쌓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비로소 봄을 맞이하던 우리에게 아직 떠나기 싫다는 듯 쏟아지는 4월 하늘의 우격다짐이다. 1월의 눈은 마땅한 시기에 마땅한 것이 오는 순리의 작용인반면 4월의 눈은 기다리는 자의 마음을 헤집는 실망의 도가니다. 이 관성의 작용 앞에서 우리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문밖을 나서고 하늘은 언제나 우리의 선택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봄 재킷 위에는 눈을, 겨울 패딩 위에는 강렬한 햇볕을 내리쬔다. 시카고 4월의 관성이다.
한국의 민주주의사도 유독 봄의 문턱에서 강한 관성을 경험한 기억이 많다. 4.19 혁명(1960)과 5.16 군사정변(1961), 10.26 사태(1979)와 12.12 군사반란(1980)은 한국 민주주의사에 존재하는 강한 4월의 관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들이다. 대통령들이 독재하고 군대가 시민을 짓밟으면서 진정한 봄을 향한 여정을 비웃었다. 어쩌면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이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민주화는 이제 완성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87년 직선제 개헌을 필두로 시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한 지 30년이 지났고 보수와 진보 간의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20년이 넘는 지방분권의 경험이 있고 더는 군대가 시민들을 배신하고 권력을 탈취할지 몰라 두려워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적인 제도주의적 민주화의 이면에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시민의 복지권, 기술적 진보, 환경과 문화, 인권과 다문화, 삶의 질과 풍성함 등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할 시기가 올 법도 한데 이상하게 우리는 여전히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사상의 자유, 공정한 선거, 그리고 공권력의 편파성 등 아주 기초적인 기본권에 대한 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4월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어떠한 힘이 민주화 이후 30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것일까?
비교정치학자인 아몬드(Gabriel Almond)와 버바(Sidney Verba)는 “시민문화(The Civic Culture)”에서 민주주의 공고화의 과정을 시민문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시민문화의 요소 중에서 특히 정치의식을 지니고 참여에 적극적인 시민의 존재와 이들이 신뢰할 수 있는 제도와 정치 공동체의 존재를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의 핵심 요소로 꼽았다. 이는 다시 말해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과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치인들, 그리고 이 정치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조화를 이룰 때 민주주의 공고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50년이 지난 이론이지만 이들의 이론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성숙을 바라는 우리에게 큰 함의를 제공한다. 이들의 이론을 대입해 볼 때 우리는 정치 엘리트와 제도의 문제가 우리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물론 사실이다. 현재의 부패하고 부정의 한 시스템과 이로부터 파생된 자신들의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보수성이 일으키는 엄청난 문제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존재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의는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과 제도의 문제가 너무나도 산적해 있는 현실이 시민사회, 즉 유권자이자 국가의 주인인 우리 자신의 문제를 가려버린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시민사회의 측면에서 보이는 핵심적 문제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의식을 지니고 참여에 적극적인 시민층이 두껍게 존재한다. 굳이 가장 최근의 촛불혁명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지난 수 십 년간 거리로 나와 투쟁하고 투표권 행사를 게을리하지 않은 많은 이들을 기억해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인지, 다사다난했던 역사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어린 민주주의라서 그런 것인지 우리 시민문화에는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참여를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해서 민주적 시민문화의 성숙을 가로막는, 즉 4월을 지속하려는 세 가지 강력한 관성의 작용이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그리고 이들은 시민 개개인의 부족함이 아닌 사회를 관통하는 문화적 힘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이 세 가지 힘은 먼저 일그러진 유교 문화, 두 번째로는 법과 정치를 관통하는 반공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도한 성장 만능주의다.
첫 번째로 한국의 민주적 시민문화의 성숙을 저해하는 요인은 바로 일그러진 유교 문화다. 우리는 흔히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그 실체를 조금만 더 정확하게 분석해보면 중국의 주자학의 전통을 따라 내려오는 학문적 유학(儒學) 보다는 비틀어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정신을 종교적으로 추앙하는 왜곡된 “유교(儒敎)”의 문화를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상이 자리 잡아 사실상 비합리적인 억압과 복종의 문화가 사회의 근간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 문화는 민주적 시민문화의 발전을 방해하는 강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특히 시민으로서 존재하는 개인들의 정치의식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단편적인 예로 한국의 유교는 삼강오륜(五倫)에 대한 폭력적인 오역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상과 대치한다. 기존에 맹자가 제창한 도덕 사상과 달리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린놈이 어디서”라는 의미로, 부부유서(夫婦有別)는 “여자(남자)가 어디서”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주체적인 정치 판단을 깎아내리고 정치참여에 귀천이 존재하고 그 귀천에 따라 정치 판단의 정당성이 변화하는 것처럼 가르친다. 나아가 유권자가 일꾼을 선출하는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군위신강(君爲臣綱)을 외치며 대통령을 임금 알 듯하고 정치인들의 정당성과 책임성보다는 그들에 대한 충정과 의리를 강조하는 문화는 합리적 정치 판단과 선택을 방해하는 강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문제는 현재 한국사회의 세대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갈등, 그리고 과도한 좌우 갈등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의 민주적 시민문화의 성숙을 저해하는 요인은 반공주의다. 특히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종북 프레임은 한국 정치사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보여주었다. 분명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해 역사적으로 반공주의는 어느 정도 필요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라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매우 가까이 존재하는 문제임에도 틀림없다. 하지만 미국의 매카시즘(McCarthyism)과 같이,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한국의 반공주의는 정치영역에서의 선의의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헌법 가치를 훼손시키는 방향으로 성장해왔다. 분배, 평등, 복지, 교육, 다양성 등 존엄한 시민의 권리와 삶의 질, 그리고 국가의 진보에 관한 논의들이 최근까지도 북핵, 종북, 혹은 친북이라는 프레임에 의해 무시되었다. 나아가 사상적 스펙트럼 또한 과도하게 제한되어 시민들의 정치적 선택의 폭을 축소하고 과도한 우경화를 유발하였다. 북핵이나 종북 행위가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들 또한 다른 국내 정치적 문제들과 국제 외교적 문제들과 함께 평행선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북한 문제가 아무리 시급하고 엄중하다고 한들 그 문제가 개인의 기본권, 시민들의 삶의 질, 그리고 우리나라의 발전을 저해할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영역에서 북한 문제는 다양한 의제들 중 하나가 아닌 아주 많은 의제들을 무효화하고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깎아내릴 수 있는, 그리고 많은 시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맹목적 반감을 일으키게 하는 반공이라는 20세기 시대정신의 잔재가 짙게 남아있는 문제다. 따라서 이러한 반공주의적 종북 프레임은 언제든지 우리 시민사회의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정치적 토론을 “빨갱이,” “종북,” “친북” 등의 말로 묵살시켜버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민주적 시민문화의 성숙을 저해하는 요인은 과도한 성장 만능주의다. 해방 이후 20여 년을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온 나라가 수출 중심의 계획경제 시기를 거치며 급성장하여 전후 50여 년 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그보다 더 특이한 것은 많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더 성장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더욱 가속화된 불평등과 더욱 심화된 경쟁의식이 우리 사회를 더욱 물질에 집착하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 시민사회는 부유함을 넘어 삶의 질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성장 이후의 문제들에 대해 먼저 고민하고 정치적인 요구들을 관철하지 않는다면 정치 엘리트나 제도가 시민사회를 먼저 구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저성장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 외치는 정치인들의 존재가 그 증거다. 최근 복지나 문화적 다양화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다가 다시 재원의 문제, 즉 성장의 문제로 연결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정말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성장이 아니라 현존하는 부의 사용 방식에 대한 재정립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부가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사용되고 분배되고 있는지, 그래서 시민들의 삶의 질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계속해서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성숙한 민주주의가 다루어야 할 다양한 의제들을 모두 성장의 논리 속으로 흡수해버릴 것이다.
4월이 떠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관성의 작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작이 있는 것에는 끝이 있다. 잔혹했던 시카고의 4월이 지나면 바다색을 띈 하늘과 봄 재킷을 반겨주는 아주 적당한 바람과 클로버들로 가득 찬 초록 동산이 미시간 호숫가의 풍경을 채운다. 언제 눈이 왔는지 알 수 없게 푸르름은 꽤 높은 건물들 사이로 건장하게 자신의 색채를 뽐낸다. 이때 비로소 행인들은 보호를 위한 옷이 아닌 빛나기 위한 옷을 입기 시작하고 추위를 조금 일찍 이겨낸 이들은 움츠렸던 어깨를 피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함께 강변을 달리기 시작한다. 비로소 시카고 5월이 오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사의 계절에도 5월은 올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몬드와 버바가 50년 전 주장했던 참여와 제도의 시너지를 통해 일어날 것이다. 단순히 투표하는 것으로 시민의 임무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 아닌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폐해들이 무엇인지, 그 개선 방안은 무엇인지, 시민 개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치밀하고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다. 이러한 적극적 참여와 고민이 수반될 때 비로소 우리 시민사회에 남아있는 문화적 폐단들을 이겨내고 나아가 제도적 문제들까지도 더욱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주화라는 정치적 진보에 시민사회의 문화적 진보가 수반되어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는 것이다.
본 글은 우리가치(www.woorigachi.com) 월례 레포트 2017년 5월호(http://www.woorigachi.com/xe/board_izjR06/130623)에 기고된 글입니다.
민주주의와 관련된 저자의 글 모음 (http://www.woorigachi.com/xe/board_aUBn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