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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준 Nov 19. 2017

망각으로 망자 죽이기

우리는 세월호를 기억해야 할까?

        “노란 리본 좀 안 달면 안 돼? 지겨워서 그래.” 한 시민이 노란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나온 정치인 앞에서 외쳤다. 아마도 그는 우리 사회가 그 일을 과도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도 있는 생각이다. 기억은 과거에 나의 에너지를 앗아갔던 어떠한 일을 현재의 에너지를 사용해 굳이 다시 떠올리는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세월호 사건과 같이 아픈 기억을 집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그 시민은 아마도 온 사회가 과거의 사건에 너무 집착한다고, 그 아픈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서 정치화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이러한 생각에 입각하여 이제는 이 사건을 잊고 넘어가는 것이 사회 전체의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이라는 가치 판단을 내린 것이다. 


위 정치인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진출처: OhmynewsTV Youtube Channel)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 시민의 반응과 판단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다. (실제로 이 일은 SNS상에서 아주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때 이른 가치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조금 더 원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 시민의 반응은 꽤나 오래된 철학적 논쟁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바로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지난 수십 년 간 쌓여온 학자들 간의 논쟁이다. 특히 이 주제는 과연 한 사회가 기억하는 기억의 양이 많을수록 그것이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지 부정적인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대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정말 미래가 없는지, 아니면 아픈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 사회의 진일보를 위해 더 좋은 방법인지 등에 관한 심오하고 오래된 논쟁과 이 시민의 퉁명스러운 한 마디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글은 이 오래된 논쟁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제공한 뒤 우리가 어떠한 시각으로 망각과 기억을 바라보 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본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억은 명사적 기억(memory)과 동사적 기억(remember)을 모두 “기억”이라 표기할 것이지만 흐름에 따라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내용은 아픔, 슬픔, 분노 등 부정적인 기억이 중심이 될 것이다. 


        이 논쟁에 대해 이해하고 위 시민의 말에 대한 최종적인 가치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먼저 이론적인 측면에서 기억과 망각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철학자 안셀-피어슨 (Ansell-Pearson)에 따르면 기억은 자발적인 부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다.[1] 다시 말해 우리가 기억을 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일 수도 있지만 큰 부분 수동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망각 또한 비슷한 구조로 작동한다. 자발적인 망각 또한 가능할지 모르나 대부분의 경우 망각은 수동적인 현상이다. 기억과 망각의 수동성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기억과 망각이 인간의 손을 떠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기에 인간이 선택하여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유한한 현재의 에너지를 과거 회상 따위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망각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면 잊어버리자고 하는 자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에 기반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크게 “받아들임”과 “약속” 두 가지 기반이 존재한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자신의 저서 <즐거운 학문(Joyful Wisdom)>에서 우리에게 운명애(amor fati), 곧 운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운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자는 사상을 제시했다.[2]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나에게 닥친 불행마저도 나의 운명으로 여기고 이를 나 자신의 역사로 여겨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운명애적 사상을 지닌 자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되새김질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이를 “사랑스러운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삶을 모색한다. 반면 인간은 약속을 통해 망각하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기억을 지우는 행위가 아닌 사회에서 혹은 집단 속에서 과거 특정 사건에 대한 언급을 중단하거나 기억할 필요성을 누그러뜨리는 등의 방법으로 적극적 기억 행위를 중단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위로, 회복, 보상 등에 대한 대가로서의 망각을 약속하는 행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망각은 여러 이익 집단이나 사회 집단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심지어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일어난다. 


        망각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렇게라도 잊어버리자고 말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내포되어 있다. 부스(W. James Booth)는 기억이 우리를 “죽고 돌이킬 수 없는 그곳”으로 이끈다고 이야기하며 기억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회상,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일으켜 시간의 흐름을 비합리적으로 가로막는 것”이라 주장한다.[3]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역동성을 뒤로한 채 과거에 현재의 에너지를 투영하는 것이기에 현실의 순간들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브러크너(Pascal Bruckner) 또한 망각을 “미래 세대를 위해 다시 시작하는 힘”이자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힘”이라 주장한다.[4] 이 또한 인간의 유한함 속에서 살아있는 자들이 살아있기 위한 공간을 만들고 미래를 향해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결국 과거에 대한 망각을 선택하고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만약 망각이 이렇게나 합리적인 것이라면 왜 그것이 그리도 불편할까? 분명 기억하는 것이 더욱 소모적인 방법인데 왜 우리는 그토록 기록하고 추모하고 기념하기를 원할까? 아도르노 (Theodore Ludwig Wiesengrund Adorno)는 그 이유를 기억의 주체들로부터 찾는다. 그는 망각이 기억의 주체들로부터 그들이 가진 과거에 대한 유일한 잔여물인 기억을 앗아가는 행위라 주장한다.[5] 특정 기억, 특히 안 좋은 기억에 대한 이미지는 사건의 찰나에 우리 두뇌에 각인되어버린다. 아주 짧지만 강력한 그 순간은 그 순간 이전의 모든 인생에서 우리를 격리시키고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를 가두어 버린다.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을 그 아픔과 관련하여 정의하게 되는 경향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자들에게 그 기억을 잊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건 이후의 자신의 삶을 정의 내린 그 기억을 버리는 것,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강제로 기억 속의 삶을 요구받은 자들에게 이제는 그 삶 마저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그들을 이중 피해자로 만드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

        아렌트(Hannah Arendt) 또한 홀로코스트로 인해 죽은 유대인들에 대해 저술하며 기억하는 것 만이 이미 죽은 망자들을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라 주장했다.[6] 망자에 관하여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듣게 되는 말에는 “이미 죽었는데 어떡하냐” 혹은 “산 사람은 살아야지” 등의 말이 있다. 이러한 말들은 근본적으로 죽음은 한 번 이루어진 이상 돌이킬 수 없고 죽음과의 의미 있는 화해 또한 불가능하다는 관념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아렌트는 우리에게 죽음과 화해하고 죽음에 대해 사후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말해주고 있다. 망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지만 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 버젓이 자신들의 생명력을 뽐낸다. 그들은 우리의 일상에 관여하고 우리의 판단력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들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을 인정하고 그들과 화해하고 “산 사람들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아렌트가 말한 것과 같이 망자들을 “구해야”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우리에게 굳이 굿판을 벌이지 않아도 된다고, 단지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망자를 기억하고 그들에 대한 올바른 기억을 서사(narrate)하는 것은 결국 기억의 주체인 죽은 자들과 잃은 자들의 엉켜버린 과거를 한 땀 한 땀 현실로, 그리고 미래로 이끌어 주는 회복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기억은 그 자체로 우리를 진일보하게 해주는 디딤돌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처하기 위한 지혜를 얻곤 한다. 기념이나 추모를 통해 통합을 이루기도 하고 과거의 유산들을 모아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기억하기를 옹호하는 이들은 많은 경우 이렇게 합리성보다는 기억의 가치와 역할에 집중한다. 


        종합해보면 결국 우리는 평생 과거에 머무를 수도, 너무 쉽게 잊어버릴 수도 없다. 유한한 에너지와 시간을 지닌 우리는 니체의 운명애적 사상을 지니고 사는 것이 합리적 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억지스러운 망각은 누군가에게는 폭력이고 누군가에게는 자아를 도적질 하는 일이다. 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망각이 답이 되는 경우도 있고 기억이 답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학자들 또한 한쪽의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닌 망각의 장점과 기억의 장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 뿐 무조건적인 망각이나 무조건적인 기억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논쟁에 기반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어떠한 기준을 통해 기억 혹은 망각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나는 과거를 기억하고 망각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기재인 “동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에서 인간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음에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 설명했다. 나아가 그는 인간이 “동감을 얻었다고 생각될 때 행복을 느낀다”라고 말했다.[7] 즉 인간은 단순히 타인 그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고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이 바로 동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동감을 “동류의식(fellow-feeling)을 느끼는 것”이라 정의하는데 우리의 논의 속에서 이는 곧 잊고자 하는 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잊어주는 것, 그리고 기억하고자 하는 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기억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앞선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노란 리본을 떼라는 시민의 외침에 대한 정치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죽은 아이가 당신의 자식이라도 그렇게 말할 겁니까?” 정치인의 대답에 정치전략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 정치인 또한 이 사건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감이라는 방법으로 피해자들의 기억을 공유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고통이 되어버린 자들에게 함께 기억해 주겠다고, 함께 마음의 짐을 짊어지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분명 우리에게는 기억할 의무도 망각할 의무도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기억하고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 망각하고 망각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시민의 외침은 더욱이나 안타까운 외침이다. 망자가 된 아이들을 이제 기억 속에서도 잊자고 하는 그 외침은 기억의 주체들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동감의 기재가 결여된 자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하기에 앞서, 그리고 망각하기에 앞서 동감해야 할 것이다. 기억을 끄집어내어 산 자를 죽이는 일도 망각으로 망자를 두 번 죽이는 일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유 - 이름에게






[1] Ansell-Pearson, Keith. How To Read Nietzsche. London: Granta Books, 2005.

[2] Nietzsche, Friedrich Wilhelm. Joyful Wisdom: With an Introd. By Kurt F. Reinhardt. New York: F. Ungar Pub. Co, 1960.

[3] Booth, William James. 2001. "The Unforgotten. Memories Of Justic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95: 777-791.

[4] Bruckner, Pascal. The Tyranny of the Guilt: An Essay on Western Masochism. Trans by Steven Rendall.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0.

[5] Adorno, Theodore. What does coming to terms with the past mean. In G. Hartmann (Ed.), 

Bitburg in moral and political perspective. Bloomington, I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6.

[6] Arendt, Hannah.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San Diego, CA: Harcourt Brace, 1976.

[7] Smith, Adam.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 London: Penguin Classics, 2010.


본 글은 우리가치(www.woorigachi.com) 월례 레포트 2017년 10월호(http://www.woorigachi.com/xe/board_izjR06/130989)에 기고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관련된 저자의 글 모음 (http://www.woorigachi.com/xe/board_aUBn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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