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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준 Nov 27. 2017

어떠한 개헌을 할 것인가?

아이슬란드의 심의 민주주의 실험

“정치인들의 수사로부터 벗어나 직접 개헌 과정에 참여하고 자신들이 빚어낸 헌법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공화국의 시민들이 되고자 하는 개개인들의 열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래로부터의 개헌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87년 헌법은 시대적 적실성을 잃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에 따른 개헌 담론은 꽤나 오랜 기간 파도 일렁이듯 우리를 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한국의 개헌 논의가 언제나 정치인들의 수사로 발생되고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87년 헌법체제를 살아오며 정치, 경제 엘리트들의 만행들을 하루 건너 목격해 온 우리는 위로부터의 개헌이 모두를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래로부터의 개헌에 대한 갈망이 크다. 정치인들의 수사로부터 벗어나 직접 개헌 과정에 참여하고 자신들이 빚어낸 헌법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공화국의 시민들이 되고자 하는 개개인들의 열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래로부터의 개헌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정치철학자 존 엘스터(Jon Elster)는 ‘모래시계’ 모델을 제시했다. 넓은 위아래와 좁은 중심을 지닌 모래시계 모양의 사회적 협의체를 통하는 이 방법에 대해 엘스터는 가장 먼저 정부, 기업, 사회단체, 그리고 시민 개개인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공론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그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소수의 집필진이 공론의 과정을 거친 내용을 토대로 헌법을 집대성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그의 마지막 과정은 다시 일반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국민투표다. 이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반시민의 참여와 승인, 그리고 실질적 제도로서 헌법의 수준과 운용성을 고려하는 전문가들의 집필 과정을 모두 내포한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정치철학자의 모델을 이상주의적 허상이라 비판하였고 실제로 국제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개헌 과정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엘스터의 모델은 2009년, 인구 50만도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유럽의 설국(雪國) 아이슬란드에서 그 실체를 처음 선보였다.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 [사진출처: https://www.thousandwonders.net]


    2009년에서 2013년까지 아이슬란드는 성적, 문화적, 인종적, 세대적 다양성을 고려하여 선출된 국회의원, 법률가, 교수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헌법 의회(Constitutional Council)를 형성해 자신들의 개헌 작업 과정을 매일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에게 검수받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며 참여적이고 상향적인 개헌을 시도했다. 그 시도는 최종 단계에서 국회의 기각으로 장렬히 기각되었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이슬란드의 참여 민주주의는 진보하였고 아래로부터의 개헌에 대한 현대적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큰 족적을 남겼다. 나아가 느리지만 투명하고 포괄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만든 헌법이 완성되어 국회에 전달되고 한 국가의 헌법적 기초를 형성할 수도 있었던 이 시도는 그 어느 때 보다 아래로부터의 개헌에 목마른 2017년 대한민국에 큰 함의를 제공한다. 


    1944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에서 직수입 한 헌법을 글자도 몇 고치지 못한 채 그대로 사용해왔다. 몇 차례의 수정헌법이 추가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아이슬란드는 타국의 구식 헌법을 빌려서 사용하는 꼴이었다. 그러던 중 2008년 아이슬란드는 경제규모 대비 세계 최악 수준의 경제적 붕괴를 경험했다. 금융업계의 윤리적 타락과 미국, EU의 경제적 위기가 겹친 상황에서 아이슬란드의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몰락한 것이다. 그 와중에 더욱 치명적인 위기는 이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도 정확히 물을 수 없도록 느슨하게 구성된 당시 헌법 구조에서부터 야기되었다. 책임을 물을 수 없기에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경제 구조에 대한 개혁을 감행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확한 한계에 부딪힌 헌법에 대한 개헌의 목소리가 큰 힘을 얻었다. 그리고 2009년 아이슬란드 총선은 이러한 개헌의 목소리에 운동력을 부여했다. 당시 선거에서 승리한 사회민주연합(Social Democratic Alliance)과 좌파-녹색연합(Left-green Movement) 두 정당이 연립정부를 형성하고 사회의 개헌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개헌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개헌 국회(Thjodfundur)의 모습

    연립정부가 공식 개헌 작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슬란드의 시민사회는 일반 시민들과 정부 기관장들로 구성된 1,500명 규모의 개헌 국회(Thjodfundur)를 구성하여 개헌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 개헌 국회를 아이슬란드 개헌 과정의 토대로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정부 주도의 국가 포럼(National Forum)으로 재정비하여 임의로 선출된 950명의 일반 시민들과 함께 공식적인 개헌에 대한 토론에 돌입했다. 국가 포럼은 무엇보다 아이슬란드의 신(新) 헌법이 도덕적 가치를 내포하고 책임성에 대해 자세히 논하며 투명한 민주주의 정체를 구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가 포럼의 이러한 제안과 신헌법의 가치 방향성 설정을 기반으로 아이슬란드 국회와 시민사회는 4월 6일부터 7월 29일까지 헌법 의회(Constitutional Council; Stjornlagarad)를 구성하여 신헌법을 작성했다. 헌법 의회는 공식 홈페이지에 지속적으로 헌법 작성 과정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였고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실제로 헌법에 내용을 포함하는 과정을 거쳤다. 

    헌법 의회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만 3천 개가 넘는 의견이 제안되었을 정도로 이 과정은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의 한 예로 헌법 의회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동물보호에 관한 내용이 신헌법에 실제로 기재되기도 했다. 헌법 의회가 만들어 낸 신헌법의 내용은 특히 두 가지의 부분에서 과거 덴마크로부터 직수입 한 헌법과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헌법의 서문(preamble)이다. 신헌법의 서문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 복지, 문화융성, 다양성, 환경 등의 분야에서 국가의 책임과 시민들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주장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아이슬란드의 신헌법이 이전 헌법과 권력구조의 부분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신헌법은 권력구조가 아닌 시민들의 기본권에 대한 내용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진정한 문제는 정부의 제도나 권력 구조의 문제가 아닌 시민들의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았음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과거의 헌법 체계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점을 반성하고 개선하고자 했던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헌법은 2011년 헌법 의회를 통과하여 2012년 국민투표와 국회 의결을 남겨두고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결국 아이슬란드의 새로운 헌법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2012년 10월 20일 치러진 국민투표에 유권자의 49%가 참여하여 헌법 의회가 만들어 낸 신헌법안을 국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권력을 얻은 사회민주연합과 좌파-녹색연합의 연립정부는 신헌법을 비준하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총선을 치르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정치권과 언론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점차 신헌법에 대한 사회 전반의 열정은 사그라지고 있었다. 신헌법 비준안은 결국 국회에 상정되었지만 반대파의 필리버스터에 의해 비준되지 못했다. 결국 2013년 총선 기간까지 비준되지 못한 신헌법은 반대파가 총선에 승리하게 되면서 결국 실패한 시도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패한 신헌법은 실망과 함께 큰 교훈을 남겼다. 정치학자인 헬렌 란데모어(Helene Landemore)는 이 실패한 프로젝트의 세 가지 장점을 1) 다양한 단계에서 직접적인 시민들의 참여를 장려한 부분, 2) 직접 참여가 불가능한 부분에서 명목적인 대표성이 제공된 부분, 그리고 3) 투명성이라 설명했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개헌이 지녀야 할 핵심적인 부분들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지속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장려했고 다양성에 기반을 두어서 헌법 의회 대표를 선출하였고 인터넷을 통해 경과를 보고하고 시민들의 평가를 수렴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앞으로 개헌을 준비하는 국가들에게, 그리고 개헌을 요구하고자 하는 시민단체들에게 큰 시사점을 제공한다. 심의의 과정과 인터넷을 통한 평등에 기반을 둔 공론장을 제공한 점은 21세기적 개헌 방법론으로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참여성, 대표성, 그리고 투명성은 21세기적 개헌에 필요한 공론장을 형성하는
핵심적 요인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엘스터의 모래시계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모래시계의 가장 윗부분, 즉 정부, 기업, 시민단체, 그리고 이렇게 일반 시민들 모두가 참여하는 일종의 '클라우드소싱 (cloudsourcing)'적 정치 선호 집합 과정을 정치학자들은 "심의(審議)"의 과정 (혹은 숙의의 과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심의의 과정을 통해 민주적 정책결정 과정을 이루어 나가는 제도를 "심의 민주주의 (deliberative democracy) 혹은 숙의 민주주의"라 부른다. 심의 민주주의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먼저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론의 장에 나와 함께 대화와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변화되는 선호를 표출할 수 있는 점에서 공공성(publicity)을 지닌다. 두 번째로 각각의 개인이 자신만의 선호를 투표라는 단일적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닌 상호적 심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상호성(reciprocity)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인 대화의 과정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최종적으로 최대 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야 하기에 배려성(others-regarding)을 지닌다. 공공성, 상호성, 배려성을 모두 고려할 때 아이슬란드 시민들의 개헌 시도는 진정한 엘스터의 모래시계 위, 즉 심의의 과정을 걸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개헌 담론이 무르익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특별히 눈여겨볼 부분은 아이슬란드 개헌 프로젝트의 공공성이다. 기존의 심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공공성은 공적인 토론의 장, 즉 공론장을 필요로 했다. 또 다른 정치 철학자 하버마스는 자신의 공론장 이론에서 공론장을 "합리적 공공성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토론과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라 설명했다. 이 공론장은 물리적인 장소로 간주되고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는 유한한 곳이자 동시에 특정 엘리트 집단만의 장이 아닌 시민권을 지닌 모두가 목소리를 지닌 곳이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를 꽃피운 아고라가 바로 이러한 공론장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시민권을 지닌 모두가 모여서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아이슬란드의 이번 시도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난히 큰 함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개헌 프로젝트는 엘리트주의를 벗어나 진정한 공적 토론의 장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공공성을 물리적 공론장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냈다. 아이슬란드의 사례가 보여준 아고라를 뛰어넘는 21세기의 새로운 공론장은 바로 사이버 공론장이었다. 헌법 의회가 공식 홈페이지뿐 아니라 다양한 SNS를 통해 시민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실제로 그 의견들을 헌법 전문에 포함하는 방법을 택한 것 기존 공론장 이론에 부합하는 공간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물리적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공론장을 제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에서도 이러한 제도적 진보가 가능할까? 불행하게도 아이슬란드의 개헌 프로젝트가 실패한 지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한국은 여전히 5년 전 아이슬란드와 같은 시도를 하는 것이 힘든 실정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이 시작할 즈음 대두된 이번 개헌 담론은 예나 지금이나 "원 샷 개헌," "권력구조 중심의 개헌" 등 절반의 개헌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다. 아니, 대통령이 바뀐 지금 우리는 어느새 개헌 문제에 대해 잊고 지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논의되고 있는 개헌 담론조차 지나치게 국회 중심의 개헌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결국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개헌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87년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개헌은 금세 국민들의 불만을 자아냈고 지난 수십 년간의 개헌 담론을 만들어 낸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위로부터의 개헌을 말하는 현재 한국의 정치 구조는 지속적으로 시민들의 실망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개헌에 대한 희망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먼저 촛불혁명을 통해 만들어진 일반 시민들의 강한 요구가 실제로 현재 정치 엘리트들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개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아래의 목소리를 위의 존재들이 두려워한다는 전제다.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정치인들의 행태를 변화시킨 시민들의 목소리를 두려워하는 국회의원들이 존재하는 현재 상황은 어쩌면 아이슬란드식 심의를 가능하게 할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최고라 불리는 인터넷 망과 다양한 온라인 정치의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다시 말해 사이버 공론장을 형성하기에 매우 적절한 인프라 기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사이버 문화는 인터넷 방송, 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 투표, 그리고 (긍정적이라 부르기는 힘들지도 모르지만) 댓글 문화까지, 사이버 공론장의 형성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편할 수 있는 구조다. 심의 민주주의 이론이 말하는 상호성과 배려성이 존중될 수만 있다면 한국은 손쉽게 아이슬란드식 심의 과정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의 신헌법은 현재 한국의 중첩된 수많은 문제들을 풀어낼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본 글은 우리가치(www.woorigachi.com) 월례 레포트 2017년 4월호(http://www.woorigachi.com/xe/130541)에 기고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관련된 저자의 글 모음 (http://www.woorigachi.com/xe/board_aUBn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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