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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성준 Jan 17. 2018

다시, 제1공화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공화국은 시민들의 동의로 만들어진 법의 지배하에 있는 공적 구조로서의 국가를 뜻한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닌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시민들의 동의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개헌의 과정에서 국민투표가 이루어진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작성한 헌법 전문에 대해 단순히 찬반 투표를 하는 것은 진정한 공화주의적 동의 과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개헌의 문턱에 서 있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떠한 시민적 덕목을 지니고 개헌에 임해야 할까?


폴리비오스 (Polybius)

        고대 로마 공화국의 헌법사(憲法史)에 대해 저술한 폴리비오스(Polybius)는 “역사”에서 고대 로마 공화국의 시민들이 헌법에 대한 특정한 “의무감(duty)”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은 이성을 통해 의무감과 의무감이 수반하는 수치와 명예에 대한 관념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1] 이러한 관념을 통해 인간은 가장 명예로운 자에게 공직을 맡긴다. 이는 다시 말해 공화국의 인간은 명예를 분배하기 위해 정치체제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누가 어떤 공직을 맡을 것인지는 결국 어떠한 헌법이 그 집단을 지배하는 법적 구조가 될지에 대한 고민과 같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공직을 맡기고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그들 자체가 곧 헌법이고 그들이 구성하는 정치체제 또한 헌법의 현실적 구현이 된다.


        헌법 그 자체인 고대 로마 공화국 시민들은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헌법의 문제에 개입한다.[2] 먼저는 명예를 분배하고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형성(formation)”의 방법이다. 두 번째로는 자신들이 형성한 헌법이 지배하는 체제를 "수용(accommodation)"하는 것이다. 폴리비오스는 공화국의 시민들이 지도자를 선택하면 “곧바로 그들의 지배에 협력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3]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들은 지도자가 독재자가 되거나 체제에 혼란이 오는 경우 헌법을 "변화(transformation)"시키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폴리비오스의 “역사”를 통해 어떤 모습의 체제이던지 상관없이 시민들이 언제나 형성-수용-변화의 순환과정을 통해 헌법의 문제에 개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성-수용-변화의 순환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정적 동의”다. 시민 개개인이 모든 과정에 일일이 참여할 수는 없다. 어떤 법은 시민이 직접 만들지 못할 수도 있고 특정 시민이 지목한 자가 지도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절한 과정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자가 여전히 동의할 수 있는 절차들을 통해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형성의 과정에서 만약 몇 명의 원로원이 모든 것을 결정한 후 시민들에게 단순히 동의를 구한다면 그것은 결과적 동의가 있을지언정 과정적 동의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공화주의적이라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헌법사(憲法史)는 어떠했는가? 흔히 말하는 제1공화국의 헌법, 즉 제헌 헌법은 국회헌법기초위원회를 통해 형성되었고 그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나 과정적 동의는 없었다. 오직 수동적 수용이 있을 뿐이었다. 그 뒤 사사오입 개헌, 5.16 군사 쿠데타 이후의 개헌, 유신헌법으로의 개헌, 전두환의 제5공화국 개헌 등 모두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오직 수용만 할 뿐 형성과 변화의 과정에 참여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87년 이전 대한민국은 민주성이 없었을 뿐 아니라 공화주의적 가치 또한 결여했다. 그렇다면 87년 개헌은 어땠을까? 이 또한 정치인들이 만든 헌법을 국민투표라는 최소한의 민주적 기재만을 통해 실현한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개헌이었고 민주적이긴 했을 수 있으나 공화주의적이진 못한 개헌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공화국이 아니다. 우리 손으로 헌법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에 제 1 공화국도, 제 5 공화국도 그저 허울뿐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분명 민주 국가다. 수차례의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를 증명하고 시민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열정과 이를 가능케 하는 제도가 이를 증명하며 지난겨울을 빛낸 촛불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제 이 민주적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개헌의 문턱에 서 있다. 단 한 번도 우리의 손으로 헌법을 “형성” 해본 적이 없기에 우리의 개헌은 어쩌면 “변화”가 아닌, 첫 번째 민주공화국을 향한 제헌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민주적 토대를 기반으로 참여하고 숙의해야 한다. 개헌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만들고, 동의하고, 책임지며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이 완성될 것이다. 



        부모님 세대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통해, 그리고 무너져가는 민주주의와 부패한 엘리트의 도덕성을 바로잡은 촛불 시민들을 통해, 우리는 폴리비오스가 주창한 국가에 대한 의무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는 모두가 떳떳한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국가에 대한 의무감을 지니고 개헌의 과정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가로막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랑스러운 신헌법의 1조 1항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 Polybius, The Historians of Ancient Rome: An Anthology of the Major Writings, Edited by Ronald Mellor, 3rd ed., London: Routledge. 2012. Bk. 6. 6.


[2] 다음 주장은 “역사”에서 폴리비오스가 주장하는 정치체제의 순환 과정에서 그가 저술하는 시민들의 활동이 보이는 패턴을 저자가 모델링한 것이다. 폴리비오스는 정치체제의 순환 과정을 왕정(kingship) – 참주정(tyranny)– 귀족정(aristocracy) – 과두정(oligarchy)– 민주정(democracy) – 중우정(mobrule)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첫 체제를 형성(accommodation)하고, 이 체제를 수용(accommodation)하고, 이 체제가 타락할 시 새로운 체제를 형성(transformation)하는 과정에 모든 권력의 근원으로서 참여한다.  


[3] Polybius (2012), Bk.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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