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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Feb 11. 2020

우리는 계급사회를 산다

티가 안 나 더 무서운


진부한 문구로 시작해보자.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선택은 가치판단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목숨줄이 붙어 있는 한 누구도 이 명제를 피할 수 없다. 내부 선택이 끝나고 외부 증명을 시작하면 흔히들 내 판단(삶)에 절대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나'로부터가 아닌 '고귀하게 여겨지는 무엇(진리)'의 권위를 내세운다. 대표적으로 종교와 예술이 그렇다. 두 판 모두 무형의 고귀한 진리를 다룬다. 누구나 진리를 탐구하고 판단하고 느낀 바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적 영역을 벗어나면서 발생한다. 한 객체가 신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거나 그의 작품이 진리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지고 다수가 동의하면, 권력이 생기고 우상이 생긴다. 권력과 우상이 생기면, 판이 생기고, 판이 생기면, 급이 생기고, 급이 생기면 돈이 생긴다. 모든 계(界)가 급(級)을 만드는 큰 이유다. 물론 어디나 마찬가지로  돈과 권력은 극소수 윗판 모인다. 나랏돈 개인돈, 언론과 대중,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오를 거야' 하고 야망을 품은 새싹 추종자들 -가장 위험한 존재들-, 다 그판에만 끼고 싶다. 왜냐하면 그게 진리니까. 이 단어를 무슨 칼 마르크스 얘기할 때나 쓰는 양 감추고 살지만 우리는 티가 안 나 더 무서운 계급(界級) 사회에 산다는 뜻이다.


권력이 생기고, 판이 생기고, 급(級)이 생기기 전, 애초에 그것은 진짜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에 더 가까이 가거나 예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건 오로지 그와 대상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로만 존재한다. 그 영역을 벗어나 외부에서 관찰되는 순간 그것은 관찰자의 세계가 되고, 그 관찰자의 판단이 표출되는 순간 또 다른 관찰자의 세계로 이동한다. 


적어도 진리를 다루는 영역에서 개인 또는 집단의 선택과 판단이 계급(界級)을 통해 타인에게 강요되는 것은 교만이자 오만이며 폭력이자 억압이다. 




이미지 : https://pixabay.com/ko/photos/수-지-협궤-열차-75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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