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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Feb 11. 2020

영화 '기생충' 아카데미 4관왕에 부쳐

이겼지만 잘 싸웠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눈도 못 뜨고 팔을 뻗어 머리맡에 둔 핸드폰부터 더듬어 찾았다. 


아카데미 4관왕이라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까지 총 4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인터넷 기사부터 페이스북 유튜브 할 것 없이 수상 장면과 축하의 메시지들이 한가득이다. 


봉 감독의 각본상 수상소감처럼 그가 국가를 대표해서 시나리오를 쓴 것도 아니고 국가를 대표해서 상을 받은 것 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계 관계자도 아니고 영화 '기생충'에 1도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할 만큼 기뻐한다. 심지어 수상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한국 사람이 만든 한국 영화가 대단한 상을 받은 것이 기쁜 이유는 그들이 민족주의자라서 인가? 아니면 단지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의 의리 같은 것인가? 각자 조금씩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는 모두에게 같은 이유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과 차별의 역사를 통해 내장된 본능이다. 


우리는 이 사건이 나와 나의 후손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과 같은 것이다. 그 차이라면 단지 과거의 무력전쟁의 승패는 명확했고 그 결과 역시 아주 빠르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의 전쟁은 많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이 시대는 '인식의 전쟁' 중이다. 이 전쟁은 아주 긴 기간 교묘하고 복잡하게 얽혀 진행되고 때로는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의 전쟁'에서 일어나는 승패의 결과물 역시 매우 긴 호흡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몇 세대에, 때로는 몇 백 년에 걸쳐 서서히 드러나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결과를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거나 당하게 된다. 


학교에서 영어로 된 원서를 읽으며 전공 공부보다 영어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때, 구글에서 쓸모 있는 자료는 죄다 영어일 때 등등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불리하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들은 너무나 많다. 특히 서구권에 사는 한국인들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은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이며 민감하고 아픈 주제일 것이다. 불과 10년 전쯤까지도 못 사는 나라 사람이 겪는 수모로 생각하고 혼자 분을 삭이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수긍의 측면도 존재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나 내 나라가 그들보다 못난 것은 어느 부분에서 사실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위상은 많이 올라가고 스스로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과 커뮤니티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중론은 '가만히 있으면 계속 무시한다. 맞서 싸워라' 정도로, 적어도 자신감은 꽤 가지게 된 듯하다. 


맞다. 역사는 늘 승리한 자를 위해 쓰인다. 차별받고 있다면, 올바르게 평가받고 싶다면 싸워야 한다. 하지만  잘 싸워야 한다.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잘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봉준호 감독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늘 얘기하듯 그는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선을 넘었다.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아시아 영화인들과 비영어권 영화인들이 그 선을 좀 더 쉽게 넘게 될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는 '나는 분열적인 욕구가 있는 것 같다. 즉 장르 자체가 갖고 있는 시네마틱 한 흥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고 싶지만, 그 규칙을 깨부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충돌한다.'라고 했다. 이는 영화라는 전체적인 어법은 잘 이용하면서도 그 안의 많은 규칙들을 치밀하게 무력화시키는 자신의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그는 로마법을 지키면서 로마법을 바꾸는 방법으로 경계를 넘어섰다.  


많은 시간 동안 쌓였지만 아직 명확한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효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폭발하고, 그 폭발은 모두의 의식에 변화를 만든다.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인식이 모두 달라지면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의 별명은 봉테일이다. 영화의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엄청나게 신경을 쓰기 때문이란다. 영화감독이 좋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무기가 있을까. 그가 세계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었던 최고의 무기는 단연 좋은 영화 그 자체다. 하지만 '영화산업'이라는 말처럼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자본과 힘의 논리, 정치가 작용할 것이다. '좋은 영화'가 나오기까지 필요한 노력은 심지어 스크린 밖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기생충'의 탄생은 그의 치밀함이 '영화' 그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 부분에서도 빛을 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 4관왕에 이르기까지 아니 수상 후 지금에도 계속되는 그의 전술은 감탄스럽다. 


일단 자막에 아주 많은 시간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고 통역사와는 무슨 영화라도 찍듯이 호흡을 맞춘 느낌이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리듬과 템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제작과 홍보 같은 영화와 엮인 모든 부분의 리듬까지도 컨트롤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막을 담당한 달시 파켓이나 통역사 최성재의 개인적인 능력도 탁월하지만 감독이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자막과 통역에서도 훌륭한 감독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볼 때마다 웃음과 감탄을 자아내는 전술은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의 태도다.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 내용과 태도 역시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나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영어와 한국어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말을 한다. 만약 반년 넘게 이어지는 모든 인터뷰와 중요한 수상 소감 등을 모두 한국어로만 했다면 어땠을까? 어차피 통역이 있으니 괜찮치 않았을까? 


아직 서구가 갖는 동양의 이미지라는 것이 그들 스스로가 만든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야말로 '이방인'이고 '미지의 세계'이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 느끼고 있으며 입 밖으로 꺼내기는 꺼리지만 막연히 자신들의 우위를 느끼기도 한다. 이에 봉 감독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영어를 섞어 쓰면서 자신이 그들과 동시대에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잘 보여주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아주 품위 있게 보여줬다. 만약 완벽하지 않은 영어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통역만을 고집했다면 이 정도 효과를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송강호도 가능한 범위에서 짧은 소감 등을 영어로 하고 나머지는 한국어로 이야기한다. 짧게 영어를 하고 한국어로 넘어갈 때도 '나 영어 잘 못하니까 미안한데 한국어로 할게.'따위의 뉘앙스를 절대 풍기지 않는다. 늘 여유를 잃지 않고 유머러스하며 당당하다. 이것은 보통 많이 이겨 본 사람, 우위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다. 어떤 형식으로든 '가능한 범위에서는 영어를 쓰고 나머지는 통역을 이용한다.' '한국 사람이 한국어 하는 것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유를 잃지 말자'등의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가끔 두 사람이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편하게 앉은 모습에서 의도가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농담 식으로라도 사전에 얘기가 됐는지도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두 번의 'Freez Moment'. 


이 두 번의 순간은 마치 영화 속 무패 변호사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를 짜 놓고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 같았다. 


그 첫 번째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수상 이후 뉴욕의 VULTURE라는 잡지와의 인터뷰다. 인터뷰어가 지난 20여 년간 한국 영화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오스카에는 후보에 조차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봉준호 감독이 던진 대답은 이렇다. "뭐 좀 이상하지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죠. 오스카는 국제 영화제도 아니고 지역축제잖아요."(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lm festival. They're very local.) 상황과 기세가 동반되지 않았더라면 봉 감독이 이런 표현까지는 안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카데미 역시 이런 발언 하나로 결과를 뒤엎리도 없겠지만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과 맞물려 이 발언은 오스카에서 표를 던지는 모두를 완벽히 포위했다.


두 번째 순간은 오스카 감독상 수상 소감이었다. 그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명언을 언급하며 영광을 돌렸고 쿠엔틴 타란티노에게는 사랑(?)을 전했으며 물론 함께 후보에 오른 토드 필립스와 샘 멘데스에 대한 존경도 빼먹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굉장히 미국스러운(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1974)) 영화 제목까지 인용하면서 소감을 마무리하는 순간, 그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할리우드의 누군가가 있었다면 마음을 고쳐 먹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마지막으로 이번 사건의 또 다른 공로는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다시 한번 봉 감독의 말을 빌리고 싶다.  


"내가 <기생충>을 선택했다기보다 이런 시대에 살다 보니 걔네들이 온 것이죠."  


감독의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많은 노력에 의해 사건을 만들기까지 완벽한 타이밍도 함께 했을 것이다. 시대적 요구와 소소한 행운들의 도움이 없이는 역사적 사건은 불가능하다. 


사건은 경험을 만들고 경험이 쌓이면 인식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면 잠재되었던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 이것이 현대의 인류가 전쟁하는 방식이며 그 방식으로 승리하는 경험을 만들어 가는 것은 어떠한 무력보다 더 강력하다. 


언젠가 비영어권 영화가 오스카 상을 휩쓰는 일이 전혀 충격적이지 않는 날을 기대해 본다. 아니 칸 영화제보다 베를린 영화제보다 더 권위 있는 영화제를 동양 어딘가에서 개최하는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런 일이 너무 당연해서 재미마저 없어졌을 때 또 다른 주목받지 못하던 무엇이 좋은 타이밍에 등장하겠지. 





이미지 : https://pixabay.com/ko/illustrations/바이러스-세균-병원-체-2058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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