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간계 연구소 Feb 14. 2020

주인공의 오류

게으른 공모자들

SNS에서 접하는 많은 글에서 '선과 악(善惡)'의 대립구조를 읽는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통찰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 사람, 사건 등등 닥치는 대로 비판하는 글과 특정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는 글, 세상의 불의에 분노를 금치 못하는 글에는 항상 '선과 악'이 대립한다. 보통 작자는 선(善)을 자처하거나 선을 대변하고 이와 상충하는 대상은 정죄해야 하는 악(惡)이 되는 구조다.


굳이 SNS가 아니더라도 말과 글이 존재하는 곳 어디든 '선악의 포맷'은 존재한다. 하지만 SNS의 세계가 그것들과 차별되는 이유는 '댓글'이라는 강력하고 무서운 시스템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의 계정을 보면 그 힘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댓글로 대통령도 되고 사람도 죽인다.


글쓴이가 유명할수록 그리고 선악(善惡)의 대비가 드라마틱할수록 많은 사람들은 쉽게 댓글을 쓴다. 그들은 억울하거나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댓글을 남기고 때로는 분노에 공감하여 그 대상을 무차별 공격한다. 선한 편에 서서 약자를 위로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사람이 되어 이야기 속의 악인을 심판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아둔하여 진실을 못 보는 사람 취급하거나 세상에 찌들어 진짜 가치를 외면하는 속물 취급을 하며 댓글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책을 읽으며, 수도 없이 많은 엑스트라들이 죽어나갈 때 슬픔을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심지어 '악'의 존재가 처참히 찢기고 고통받는 정죄의 순간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까지 한다. 그러나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그가 웃으면 웃고 울면 운다. 그의 희로애락에 공감하며 그를 응원한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마치 실제 아주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맞이한 듯 슬픔에 잠겨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야기를 만날 때 우리의 감정이입 대상은 늘 주인공이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접하는 이야기에는 맹점이 있다. '나'로서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3자가 보여주는 '그들'의 이야기가 갖는 두 가지 간극이다.


첫째는 '관점의 수적 열세'에서 오는 이야기의 편협함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관점에 따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인공이다. 무한한 이야기들의 레이어가 켜켜이 쌓여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선인지, 누가 악인 지를 구분하는 극명한 선(線)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극에는 하나의 앵글 즉 화자의 앵글만 존재할 뿐이다. 청자는 오직 화자의 앵글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시간의 분절'에서 오는 이야기의 불연속성이다. 현실 세계에서 이야기를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의 시간을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안에는 군더더기라고 할만한 것들과 아무런 현상도 보이지 않지만 의미 있는 시간들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달될 때는 시간적 제약과 비약을 피할 방법이 전혀 없다. 효과적 전달을 위해 혹은 화자의 이기심의 발로(發露)로 잘라낼 것을 과감히 잘라내고 편집되고 분절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과연 외부로부터의 이야기로 우리는 무엇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게으르게 앉아 화자의 앵글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에게 악인의 낙인을 찍는다. 그것은 참으로 비열하고 무책임하다. 사건에 대해 능동적 경험을 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도 없고, 나비효과에 대해 어떠한 리스크도 염두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 쉽게 '용감한 정의의 '라는 감정을 취하고 숨어 있다가 판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런 책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반대편에 서서 또 다른 화자의 앵글을 보며 정의의 칼을 휘두른다.


나는 이 장면이 가끔 섬뜩하다.




이미지 : https://pixabay.com/ko/photos/쟌-느-디-부-아크-동상-418576/


작가의 이전글 전문가 시대의 종말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