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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Feb 12. 2020

전문가 시대의 종말 3

다중 정체성의 시대(multi-identity generation)

'약 500년 정도 미친 듯이 만든 벽들을 다시 허물고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야 생존할 수 있다.'


새로운 조합의 시작은 권위와 통념이라는 성을 만들고 각자의 권력과 영토를 수호하는 군주의 시대 즉 '전문가 시대'의 붕괴다. '전문가 시대'는 끝이 나고 한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시대, '다중 정체성의 시대(multi-identity generation)'가 도래했다. 


'다중 정체성'을 가능케 한 첫 번째 원인은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발달이다.  

과거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해 우선 일정량 이상의 기술을 습득해야 했고 그 기술이라는 것은 보통 장인에게 직접 배워야 했으며 체득하기까지는 꽤 많은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거의 모든 정보, 자료 또는 노하우(know-how) 들을 찾을 수 있고 많은 기술들을 머신이 해결해주고 있다. 평생을 바쳐도 절대 못 배울 정도의 기술과 정보를 통해 한 객체는 여러 영역에 걸친 '결과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발전이 환경적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면 '물질적 풍요'는 결과적으로는 심리적 변화에 더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중세 군주나 현시대의 재벌처럼 먹이 사슬의 최상위가 아닌 많은 사람들도 생존을 위해 하루의 모든 시간을 한 가지 노동(직업)에 바치지 않을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과거 왕과 귀족이나 즐길 수 있던 것들을 감히 '여가'라는 이름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주로 시작은 미술이나 음악 같은 소위 예술 분야였지만 지금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직업'이 아닌 다른 분야의 일을 '여가'나 '취미'라는 이름으로 한가롭게 즐기기만 했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정해 놓은 틀에 자신을 맞추었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배웠으며 그들을 어설프게 모방하는데 그쳤다. 그야말로 급이 낮은 '아마추어(amateur)'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오래 유지되면서 그들은 '비전문가'로서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틀에 갇힌 전문가들이 생각지 못하는 것들, 각자의 '직업'과 '다른 경험'들이 만들어 내는 창의성이 발현되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Why not?!'의 마인드를 갖게 되었다. 더 이상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의 뒤를 쫓거나 급이 낮은 '아마추어(amateur)'가 아니라 또 다른 형식과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 엄청난 심리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전문가'들과 '전문가들의 결과물'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 지친 사람들 역시 아마추어의 결과물을 소비하고 응원하고 때로는 스스로도 용기를 얻어 동참하면서 이러한 변화의 영역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예전에는 배우가 가수를 하거나 가수가 배우를 하면 한 가지나 잘하라고 욕을 많이 먹었다. 욕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연기' 또는 '노래'를 너무 사랑해서 그 세계를 아무나 드나드는 곳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정한 가치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 사람이 그 세계를 드나들면 격이 떨어질까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런 비난은 거의 보기 힘들다. 가수가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연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미술도 하고 사업도 하고 유튜브도 한다. 방송을 비롯한 돈 버는 수안이 좋은 많은 분야들은 이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을 이용해 콘텐츠를 만들고 성공시키고 있다. 사실 이미 그의 정체성은 가수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심지어 분야 간의 이동뿐 아니라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래퍼 '마미손'은 사실 '매드 클라운'이라는 또 다른 래퍼와 같은 몸이지만 좀 다른 음악을 하는 다른 존재, '팽수'는 인형탈을 쓴 사람이 아니라 그냥 '팽수'라는 존재다. '유재석'은 '유산슬' 역시 같지만 다른 존재다. 그는 실제로 활동할 때 신인가수 유산슬로서 개런티를 받고 일했고 심지어 유산슬은 갓 데뷔한 사람이나 받을 수 있는 '신인상'도 받았다. 신화의 '에릭'이 '문정혁'으로, 빅뱅의 '탑'과 '최승현'이나 '솔비'와 '권지안'처럼 다른 분야에서 활동할 때 다른 이름을 쓰는 것은 연예인뿐이 아니다. 필명, 예명, 가명 등등의 다른 이름을 갖고 싶은 욕망은 이미 오래된 얘기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자신을 또 다른 사람으로도 봐달라는 신호다. '나는 이미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인정했으니까 너도 좀 알아줘.'라는 뜻이다.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또 다른 자아, 또 다른 정체성을 타인에서 인정받고 싶은 심리의 발현이다. 

 

전문가(professional)와 비전문가(amateur)의 기준이 '기술의 차이'라면 인간보다는 머신(machine)을 프로페셔널로 인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 척도가 '수입'이라면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예술가들과 경제적 성공을 이루지 못한 많은 실력자들은 프로가 아니다. 혹은 실력은 누가 봐도 미천한데 돈 잘 버는 사람도 있고, 입에 풀칠도 못하는 천재도 있다. 누군가는 '태도'를 얘기하지만 그것도 매우 주관적이다. 

즉, 그 경계를 나누는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문가'라는 개념을 목숨 걸고 지키는 이유는 사실 결국 두려움이다. 그들은 보통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하거나 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천한 사람(아마추어)과 섞여 자신의 가치가 떨어질까 두렵고, 그 일이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밥그릇을 뺏길까 두렵다. 나아가 평생을 바친 그 일이 AI나 '아무나'에게 점령당해 의미가 없어지면 치열하게 보낸 자신의 지난 삶,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부정당하는 느낌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면, 밥그릇을 지키고 싶다면, '전문가라는 성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권위를 내려놓고 소통하고 협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비전문가(amateur)로 여겨지던 사람들과 그들이 만드는 결과물들의 가치를 자신의 그것도 동등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계에 부딪힌 전문가와 전문영역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며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담컨대 그 나머지는 다 도태될 것이다. 


지금도 그 세계에서 정해 놓은 기준에 부합하는 '결과물'만이 더 가치고 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 가치 있는 정체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우직하게 단 한 가지 정체성만을 유지하는 것이 전문가(professional)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봐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변화는 당신 안의 다른 생각들, 다른 감정들, 다른 모습들, 다른 욕망들. 


변화는 항상 먼저 와 있고 우리는 늘 뒤늦게 감지한다. 




이미지 : https://pixabay.com/ko/photos/공상-극적인-지진-해-일-물-43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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