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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계 연구소 Mar 13. 2020

빛 (Light)

초월적 존재

호기심 많은 9살이었던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또래의 사촌 형이 살았기에 매일 같이 놀았고 종종 엄마가 허락하는 날이면 그 집에서 잘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우리는 항상 크고 작은 사고를 쳤다.


그때 전기 콘센트는 220V 돼지코가 아니라 110V 11자였다. 지금처럼 젓가락을 넣기에는 좁았던 것 같고, 종이를 정리할 때 쓰는 클립을 넣기에 딱 좋았다.


이모와 이모부가 잠들면 우리는 방에서 기어 나온다. 주방에 가서 고무장갑을 챙겨 오고 공구상자에서 뺀찌를 꺼내온다. 그리고 중요한  준비물, 클립. 혹시나 들킬까 작은 스탠드 불빛만 켜 두면 만반의 준비가 끝난다. 무슨 대단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냥 마음의 준비를 하고 클립을 콘센트 안에 넣으면 퍽! 소리를 내며 터진다. 꺼내보면 검게 그을리고 찌그러진 클립 위로 연기가 핀다. 그 모양이 너무 웃겼다고 해야 하나… 행복했다.


한창 이것저것 넣다 보니 형은 옆에서 곯아떨어졌다. 나도 자야겠다 싶어 의지하고 있던 작은 스탠드의 스위치를 내리는 순간 의도치 않은 퍽! 소리와 함께 눈 앞에 강렬한 빛이 번쩍했다.




‘내 눈이 멀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설마설마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일말의 빛도 없는 어둠뿐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잠들어 있는 형의 얼굴에 내 얼굴을 닿을 만큼 가까이 해도 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넋을 잃고 앉아서 눈이 보이지 않는 삶보다 앞서 걱정했던 것은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였던 것 같다.

살아온 날 들과 살아갈 날들의 필름들이 다 지나갈 즈음 흐릿하게나마 무언가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눈을 부릅뜨고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내 손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에야 장난꾸러기 소년의 짧은 해프닝이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순간은 나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이었다.




빛은 무엇일까?


인간은 '가시광선' 안에 있는 빛의 영역만을 인지할 수 있다. 사물에 빛이 반사되면 '가시광선'이라는 틀 안에서 그것의 형태를 느끼고 색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빛의 결과물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 빛의 일부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감히 전부를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빛이 빚어낸 작디작은 결과물에 얼마나 자주 교만한 확신을 갖기도 하던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들도 빛을 반사한다. 암흑이라 느끼는 곳에서 조차 빛은 존재한다. 인간의 인지 능력과 무관하게 빛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은 없다. 그것은 사실 '어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직 빛의 많고 적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완전한 빛의 부재 조차도 존재할 수 없다. 빛은 어둠의 반대가 아니다. 빛은 어둠의 통치자다.


또한 빛은 시간의 통치자이다. 시간은 인간의 공간적 인지적 한계와 빛의 관계가 만든 인위적인 개념일 뿐 빛의 속도를 초월할 수 있다면 과거-현재-미래의 개념도 초월할 수 된다. 대한민국이 낮 12시 일 때 아르헨티나가 밤 12시 인 이유는 공간의 차이가 빛을 보는 시간의 차이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1년이라는 시간은 지구에서 같은 별이 다시 관측되는 주기를 그렇게 정했을 뿐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볼 수 있다면 8분 20초 전의 태양이고 오늘 밤 달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1.3초 전의 달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살 고 있다기보다 단지 빛이 허락한 시간을 살고 있다.  


누군가에겐 과학이고 누군가에게는 ‘신’의 축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빛을 대하던지 그것이 이성과 감각을 훌쩍 넘은 초월적 존재임은 분명하다. 끝없는 우주 안에 작은 점보다 더 작은 곳에서 세상의 중심을 외치는 무지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빛에게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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