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들롱 표 '고독'의 시작
'사무라이보다 고독한 자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정글의 호랑이 정도일 것이다.'라는 오프닝 문구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한 고독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살인 청부업자인 제프 코스텔로(알랭 들롱)는 몸시 암울하고 건조한 도시 파리의 한 단칸방에서 양복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잠시 누워있다 곧바로 일어서서는 거울을 보며 트렌치코트를 걸쳐 입고 중절모를 눌러쓴 채 방을 나선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는 뭔가를 탐색 하 듯 주위를 둘러보고는 한 자동차에 탑승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다량 열쇠들을 꺼내 하나씩 맞춰보는데 처음 몇 개는 들어맞지 않다가 결국 하나가 들어맞아 시동이 걸리고 어디론가 출발한다. 중간에 한 차고에서 번호판을 바꾸고 일을 치를 권총을 구매한 다음 자신의 애인인 잔(나탈리 들롱)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다음 한 나이트클럽으로 가 오너로 보이는 사람을 단번에 쏴 죽인다. 그리고는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오지만 목격자가 있었다. 바로 클럽의 피아니스트인 발레리(캐시 로지어).
이후 경찰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유력한 용의자들을 선별해 경찰서 심문대 앞에 세운다. 제프도 물론 그중 하나이다. 착석에 있는 경찰들과 증인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용의자들 이들 사이에 어두우면서도 냉행한 분위기가 흐르는 와중에 심문이 시작되는데 이윽고 제프의 차례가 왔다. 여러 증인들이 그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지목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인인 발레리는 의외로 그는 범인이 아니다고 증언한다. 그리하여 혐의를 벗어나는 듯했으나.. 너무 완벽한 알리바이가 의심스러운 경찰이 그를 더욱더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시켜 미행케 하고 여자 친구의 집까지 찾아가기도 하고 심지어 제프의 집에 몰래 도청장치까지 설치하기도 한다. 한편 그 와중에 파리의 한 교각에서 의뢰인의 부하를 만난 제프는 임무는 완수했으나 경찰에 쫓기고 있다고 말했고 제프의 말에 그는 방아쇠를 당겨 제프를 죽이려 하지만 팔에 경미한 부상만 입히고 도망치게 된다.
얼마 후, 이번엔 제프의 집으로 찾아온 의뢰인의 부하는 거액을 주며 다음 살인 의뢰를 하지만 제프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의뢰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위협하고 의뢰인의 주소를 알아내 자신의 의뢰인을 살해해버린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발레리에게 호감을 느꼈던 제프는 결국 마지막으로 일을 치르러 다시 클럽을 찾아간다. 그리고 발레리에게 총을 겨누지만 잠시 후 이미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총알세례를 받으며 처참하게 죽는다. 한데 경찰이 그의 권총을 열어보니 빈 총이었다. 즉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 위해 생애 마지막 장소로 자신이 마지막 일을 했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알랭 들롱의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트렌치코트, 중절모, 담배, 지독한 외로움에서 온 듯한 암울한 표정, 날카로운 눈매, 과묵함 등 알랭 들롱 전매특허 이미지. 그런 알랭 들롱의 고독한 이미지를 탄생시킨 영화가 바로 1967년에 개봉한 《사무라이》라는 영화이다. 국내에는 1968년 《고 독》이라는 영화로 개봉했고 조지 펠레그린이 쓴 소설 《낭인 The Ronin》을 원작이며 《태양은 가득히》, 《볼사리노》 시리즈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이며 페르소나적 관계라 할 수 있는 쟝 피에르 멜빌과의 첫 만남이었고 그 결과는 실로 대성공이었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후, 수많은 배우와 감독이 이 영화를 오마쥬 했으며 그 대표작 중 하나로 오우삼 감독 주윤발 주연의 홍콩영화《첩혈쌍웅》을 들 수 있다. 사무라이에서 킬러와 피아니스트의 관계가 영화의 포인트였다면 첩혈쌍웅에서는 킬러와 클럽 가수가 영화의 줄거리를 이끌어 나간다.
이 영화를 찍기 전까지 알랭 들롱은 나름 대사도 많고 활발한 성격을 가진 배역을 많이 맡았지만 이 영화를 기점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말수가 극도로 적고 정적이지만 필요한 경우에 결정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고독하고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는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물론 감독인 멜빌과 시나리오 작가가 그런 이미지를 구축하고 정립했겠지만 결국은 알랭 들롱 본인에게서 나는 아우라와 연기력이 최종적으로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캐릭터가 완성되어 영화에서는 여러 누아르적 분위기를 풍기는 장면들이 많다. 30~40년대 할리우드 누아르 영화, 70년대 프랑스 영화에서처럼 시종일과 비춰주는 도시의 무미건조함과 마치 커다란 폐가를 연상시키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영화 시작부터 제프가 애인을 만나기 전까지 한마디 대사 없이 약 10여분 동안 영화가 진행되는 장면, 비 오는 파리의 날씨와 때맞춰 흘러나오는 영화음악이 특유의 회색 빛깔의 영화적 색채가 왠지 모를 긴장감이 들게 한다. 그리고 제프가 스스럼없이 사장실로 들어가 '죽어라' 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거침없이 총을 쏴대는 장면 등등 폭력과 죽음의 미학을 강조하는 누아르적 색채가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알랭 들롱이 연기한 제프 코스텔로라는 인물이다. 그가 연기한 제프 코스텔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제목 그대로 '사무라이'이다. 역사적 기원을 돌이켜 볼 때, 사무라이는 자신이 모시고자 하는 영주의 지시하에 행동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제프 코스텔로는 사무라이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인물인데 다른 점이라면 자신의 영주는 타인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 이라는데 있다. 이런 그의 이념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를 스스로 정하는 주체적인 인물. 즉 자기 자신을 위한 '사무라이'인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신이 살인을 벌였던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자신의 죽음을 그대로 맞이한 것이다. 이런 특징이야 말로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사무라이 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