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잎처럼 가볍고 단단하기 10화 - 시작의 순간
카페를 시작하기 위해 공사 업체를 고르던 어느 여름,
나는 여러 곳에 견적을 요청했었다.
그중 한 사람, 독일 유학파 건축설계사였던 대표는
“차를 만드는 카페는 국내 최초이며, 장인의 정신이 담겨야 할 공간”이라며
서울에서 청주의 외곽, 이 조용한 시골까지 직접 내려왔다.
그의 눈빛에는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선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공간은 꼭 제가 해야 합니다.”
나는 하동을 떠나 마음도 형편도 여유롭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의 진심과 열정에 마음이 움직였다.
함께 하기로 한 결정은, 지금 돌아보면
나에게도, 그 공간에게도 가장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때로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들이
냉철한 계산이 아닌 가슴의 울림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무더운 한여름, 그는 단 하루도 흐트러짐 없이 공사를 진행했고,
작은 디테일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간의 색감, 가구의 배치, 사람들의 동선까지
모든 것을 차를 마시는 경험을 중심으로 설계했다.
그는 말했다.
“차가 있는 공간이라면, 돌과 나무 소재가 더해지면
사람의 마음이 더 편안해질 거예요.”
그 말은 단순한 설계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공간을 짓는 법뿐 아니라
마음을 짓는 법도 함께 배웠다.
돌은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자연의 침묵이고,
나무는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기억하는 생명의 따스함이다.
그리고 차는 그 모든 시간과 기억을 한 잔에 우려내는 마법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만났을 때,
공간은 단순한 장소를 넘어
시간의 깊이를 품은 특별한 장소로 변모했다.
지리산을 떠나 두문불출하던 시간,
모든 것이 낯설고 외롭기만 했던 그 무렵,
나는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위로를 받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
환한 공간의 색감.
테이블에 얹은 돌의 질감이 주는 단단함까지.
공간은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차향기와 따뜻한 원목 가구,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땀 흘리던 사람들 덕분에
나는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었고,
나의 차를, 나의 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창가에 혼자 앉아 차를 우리며
내가 걸어온 길,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침묵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다시 나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간에 머무르며,
하동에 두고 온 모든 것들—사람들, 시간들, 기억들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차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움을 우려내고, 기억을 블렌딩 하고,
그렇게 내 차에는 지나온 삶이 스며들었다.
여름밤 지리산 계곡의 서늘함을 담은 녹차,
가을 하동 차밭의 안개를 품은 발효차,
겨울 눈 내리는 날 마시던 생강차의 온기까지.
모든 차에는 이야기가 있었고,
모든 블렌딩에는 시간의 층이 쌓였다.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종종 물었다.
“이 차는 어떤 느낌으로 만드셨나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이야기는 말로 전할 수 없고,
오직 향과 맛으로만 전달되는 법이니까.
그 공간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내가 다시 세상과 연결되기 시작한 작은 정원이었다.
처음에는 소수의 손님들만 찾아왔지만,
입소문을 타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 특별한 차의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내려놓기 위해,
어떤 이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어떤 이는 그저 고요함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들 모두에게 이 공간은 각자의 의미로 다가갔다.
돌과 나무, 그리고 차가 만들어낸 이 조화로운 공간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연결은
가장 단순한 것들에서 시작된다는 것.
시간이 흐르며 공간은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았다.
봄에는 늘 제비가 찾아오고
여름에는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차를 마시는 경험에 깊이를 더했다.
계절마다 나는 새로운 차를 블렌딩 했고,
손님들은 그 변화를 기다리며 찾아왔다.
일 년, 이 년,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이제 이 공간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특별한 장소로 자리 잡았다.
돌이켜보면, 이곳은 단순한 비즈니스를 넘어
나의 영혼을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이곳은 내가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마음의 집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시작에는
“이 공간은 꼭 제가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한 건축가의 진심 어린 열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손님들도
이 공간이 주는 특별한 느낌만큼은 기억해 간다.
돌과 나무, 차 그리고 사람.
이 네 가지 요소의 조화로운 만남이
나만의 작은 우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첫 차를 우리며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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