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계단을 올라서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랜만에 연애공백기를 가진 두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다들 제각각의 하지만 비슷한 고민들을 갖고 있더라 역시. 결이 비슷한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많이 벌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아주 안정된 사람과의 연애, 그리고 너무나 몰입했던 연애의 끝을 이야기하며. 그리고 추천해주고 받은 열한계단을 읽으며 '멸균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열한계단/채사장
“하나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우리를 먹고살게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하며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 삶은 너무나도 아쉽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즐기고 여행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일 테니까.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
“충분한 시간과 경험이 주어지지 않은 가운데, 자신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한 번에 도약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자신만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불편함은 설렌다. 어떤 책 속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방금 새로운 대륙에 도착했다는 존재론적 신호다. 이제 기존의 세계는 해체될 것이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 더 높은 단계에서 나의 세계가 재구성될 것이다. 하나의 계단을 더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불편함을 권한다.”
어쨌든 우리는 다음 계단을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계단을 올라서기 위해서는 우선 발을 떼어야만 하고, 한 다리만을 지탱한 채 다음 다리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디딘 발에 힘을 꽉 주지 않으면 제대로 다음 계단을 밟고 올라서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책에서는 몽골사막에서 은하수를 보면서 느꼈던 충만한 행복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완벽했던 순간, 동시에 이렇게 완전한 행복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는 직감한다. 얼마나 슬픈 행복인지.
“잠을 자는 게 아쉬웠다.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잠에 들면 혼자 게르를 빠져나왔다. 세상은 불빛 하나 없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쏟아질 듯한 별들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 동화책에서 읽었던 은하수라는 단어는 당연히 문학적 표현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밤하늘에 별들의 강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스물한 살이 되어서 나는 처음으로 은하수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밤하늘에는 실제로 별들의 강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선명하고 짙은 우윳빛이었고, 한쪽 하늘에서 시작해서 내 머리 위를 거쳐 반대편 하늘까지 거대하게 이어져 있었다.
이제 그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였다. 그 순간 너무나도 맑은 정신 속에서 나는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그것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인생 전체를 조망한 느낌. 아름다운 자연 속에 너무도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있는 완벽한 순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준비해놓은 가장 완벽한 순간임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살아간다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삶을 구차하게 끌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나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다. 거의 찰나와도 같았지만 그 순간의 충만감이 너무 황홀해서 이 순간이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주는 불안이 얼마나 컸던지도 생생하다. 참 모순적이지만, 완벽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래서 부서질 것을 예감했다.
멸균된 행복vs 튼튼한 긍정
어떤 게 너무 완전하다는 것은 사실 이상하다. 많이 불안하고 약하다. 쉽게 무너지고 한번 무너질 때는 와장창 산산조각나며 부서진다. 멸균된 환경 속에 만들어진 행복도 그렇다. 싯다르타가 왕의 걱정때문에 세상의 부정성이 완전히 소거된 환경에서 자랐기에 병자와 노인을 보고 갑자기 큰 우울에 빠진 것처럼. 다행히 그는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지만.
김중혁은 뭐라도 되겠지에서 약간의 체념이 섞인 긍정이 튼튼하다고 말한다. 멸균에 대해서 살짝 찾아보니 비슷한 맥락의 글이 있었다. 부정성을 완전히 박멸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완전히 멸균된 환경이 인간의 건강이나 면역체계에는 오히려 최악의 환경인 것처럼 '부정성이 없는 긍정성'은 우리를 위기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흰 쌀 밥에 섞인 한줌의 잡곡이 우리 몸을 더 건강하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이제 그 약간의 체념이, 부정성이, 고난이, 죄책과 자책이 우리의 행복을 튼튼하게 만들어줄 자양분임을 배워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한번에 모든 계단을 점프하듯 뛰어넘을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한계단 한계단 올라서는 일은 역시나 오래 걸리고 힘들테다. 그러니 비슷한 높낮이의 계단에서 각자가 각자의 무게를 안고 오르고 있는 친구들과 자주, 아니 가끔이라도 깊이있게 마음을 나누고 싶다, 고 생각하는 밤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당신이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가? 두 가지를 구분해서 사유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 사회 공동체의 객관적 판단을 구분해서 다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사회 공동체의 객관적 판단에 종속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사회가 규정한 정답과 다를까 봐 전전긍긍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학문이 지금까지 밝혀낸 정답을 당신이 맞힐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섬세하게 숙고함으로써 판단하게 된 스스로의 전망을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 넣지 않기를 바란다.”
“소중한 것일수록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하고, 부부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하고, 자녀는 속마음을 부모에게 말해야 하고, 연인은 모든 추억을 함께해야 하고,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해야 하고, 세상은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눈과 입은 원래가 모난 까닭에 가까운 대상일수록 쉽게 흠을 찾아내고, 쉽게 상처를 입힌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