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존재이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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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하다.
스무 살 때는 '이해'를 믿지 않았다. 누가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말. 누군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했다. 모든 관계가 가식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모든 웃음은 비웃음처럼 들렸고, 사람들이드러내는 슬픔은 과도해 보였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이해를 믿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결론은 여전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언젠가 완료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영원히 진행할 수밖에 없는 동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이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 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지만, 사십 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살마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이해를 믿지 않고 우울했던 스무 살의 청년이 소설가가 되었다는 건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문장이야 틀리지 않게 쓸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얕고 관계에 대한 통찰력도 부족한 내가 제대로 된 소설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도 그 의문은 여전하고, 좋은 소설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론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위로가 있으며 (예술이 위로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위로를 위해 여러 명의 예술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방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눈물 닦아주고 그의 등을 토닥인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체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지만 바깥에서 이렇게 외친다. "놀자!" 나는 아직까지 방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등을 토닥여줄 자신이 없어서 밖에서 같이 놀자고 소리를 지르는 쪽이다. 언젠가 나도 방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겠지만 아직은 밖에서 불러내는 쪽이 마음 편하다. 울고 있는 게 마음 아프지만 바깥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그렇게 즐겁기만 한 곳이 아니란 걸 안다. 세상이 무서운 곳이라는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도 필요하고, 직접적인 위로가 필요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직접적인 위로를 하려고 한다면 아마 세상은 재미없게 변하고 말 것이다. 열심히 놀면서 '아, 세상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었지'라는 걸 깨닫게 해주려는 예술가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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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들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가수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건모를 김범수가 대체할 수 있을까? 이소라를 임재범이 대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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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퀴방에서 우리가 호명했던 뮤지션들의 이름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1인칭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세계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나'가 중요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향하는 길이 중요했다.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요즘의 내 세계는 '3인칭의 세계'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은 무덤덤해졌고,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1인칭의 장점이 있고 3인칭의 ㅈ아점이 있다. 1인칭의 세계는 열정적이지만 배려가 부족하고, 3인칭의 세계는 공정하지만 솔직함이 부족하다.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요즘 어떤 노래를 들으세요?
저는 힙합 열시밓 듣다가 요샌 데미안 주라도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뮤트 매스라는 이름을 외웠고, 배영준씨는 휴대전화 메모 창에다 데미안 주라도의 이름을 적었다. 이름 두 개 교환했을 뿐인데, 거대한 두 개의 세계를 교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뮤지션의 이름을 서로 교환하는 것도 그런 일인지 모른다.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건, 그의 이름을 교환하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인지 모른다. 그의 모든 앨범과 그의 멜로디와 리듬과 그가 영향받은 뮤지션과 영향을 준 뮤지션의 이름을 함께 호명하는 것이고, 나의 취향과 내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나는 PC통신 속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해왔던 것이다. 음퀴방에서 우리가 호명했던 뮤지션의 이름들, 노래들이 우리를 더 큰 세계로 이끌었던 것이다. 나는 W&Whale의 음악을 들으면서 오래전 PC통신 시절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꼈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음악을 만들고,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그 음악을 들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모든 게 노래다.
모든 게 위로다.
나와 공명한 많은 문장들 중에 이 글은 따로 갈피를 해두고 싶었다.
나는 김중혁의 문장이 좋다.
글이 사람을 드러낸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듯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내 그가 더 좋아졌다.
이해한다고 단정하지 않지만 위로하려 애쓰는 것,
우리에게 얼마나 그런 존재가 절실한가.
섣부르게 이해하려 들지 않고, 위로를 강요하지 않고
무심한 듯 배려 깊은 목소리로 나를 골방 밖으로 불러주는 존재가 곁에 있다면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더라도 세상은 한결 포근할 거다.
그런 존재가 언제나 사람일 수는 없기에
우리에겐 예술이 필요하고
우리는 모두 다른 감정의 결을 지녔기에
세상엔 다양한 예술이 각자의 위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화려하진 않지만 진심어린 따뜻함이 있어서
사뭇 장난스러운 척하지만 그 뒤의 수줍은 노력이 느껴져서
그의 글이 나에겐 위로다.
18.7.24
이 글을 읽은 이후로 나의 마음 한편에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나름의 자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노회찬 의원의 자살, 비보, 충격.
아끼는 친구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 멍-
조금이라도 아끼는 그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위로를 하고 팠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하루이틀 속없이 지나가버린다. 남의 슬픔이 타인에게, 아니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겨우 이정도일 뿐인걸까. 그 슬픔에 공감도 깊이 못 하면서, 안 하면서, 어떻게 위로를 하겠다고. 어떻게 나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리 선선히 소망했을까. 새삼 부끄러워지는 밤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죽음을 가장 충실하게 애도하는 길은 그 죽음 이전으로 더이상 돌아갈 수 없도록 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데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방향전환을 겪겠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수동적인 전환을 능동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와 같은 근본적인 전환이 생긴다면 정확하게 그 전환의 폭과 깊이만큼, 타자는 내 삶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도의 과정에서 내 삶의 방향전환이 이뤄질 때 그 방향전환의 폭과 깊이만큼 타자는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일 수 있다는 우리의 실천적인 주문은 곧바로 다음과 같은 반문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
어떤 주체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 없고 어떤 대상도 너무 많이 애도될 수는 없다. 애도는 늘 부족한 것이어서 '너무 많은' 애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또 애도는 삶의 질서를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기도 해야하니 그저 '너무 많은' 애도이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는 없다.
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