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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Apr 02. 2020

[@Jeju] 행복에 헤퍼지는 법

우당탕탕 떠난 제주 캠핑, 계속되는 시행착오 속에서

I am 프로 아마추어 '허당'

해본 건 많지만 제대로 아는 건 별로 없는 찐허당이다. 잘 모르고 일단 시작하기 때문에 대체로 용감한 편이라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 포부는 거창해서 매일이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덕분에 계획없이 떠나자는 이번 여행에도 덜컥 합류했다. 명상요가를 하자며 그럴싸한 싱잉볼을 가져왔지만 제대로 연주할 줄 모른다는 것은 비밀. 캠핑러버라지만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캠핑카도 처음 타보는 허당은 수시로 터지는 문제에 대책을 찾으며 고군분투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희망의 리액션 담당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은 잘되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캠핑카를 타고 제주도를 여행한다.


 이 문장이 내 눈 앞에 펼쳐질 거라고는 이주일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웃도어 라이프를 주체적으로 즐기는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계획을 나누던 밤, 나는 0.1초만에 그들과의 제주 캠핑카 여행도 함께 하기로 정했다. 이 예상치 못한 문장 속으로 나를 덜컥 밀어놓고 나니 예상치 못한 모험이 시작되었다.     


금요일 낮에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캠핑카부터 빌리러 갔다. 약속된 장소에는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어 보이는 캠핑카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제주캠핑카 010 XXXX XXXX’라는 문구를 앞뒤로 큼지막하게 달고 있는 오래된 캠핑카를 마주한 순간부터 이미 ‘낭만적인’ 여행을 하기란 글렀다는 생각에 우리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기대반 근심반으로 캠핑카 사용법을 듣고 있는 우리들


계획은 딱 하나, 해가 지는 것을 보는 것     


캠핑카는 처음 운전해본다는 •행동대장•이 거침없이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었다. 캠핑카 안에는 아래 위로 빽빽하게 수납장이 채워져 있었는데 차의 미세한 들썩임에도 수납장 문짝들은 요란한 소리로 존재감을 발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가 펼쳐졌고 우리는 모두 동시다발적인 환호를 내질렀다.


첫날의 계획은 딱 하나였다. 해변을 따라가다가 노을이 질 때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둔 채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저녁을 해먹는 것. 우당탕탕 합주하는 캠핑카의 소리에 익숙해질 때쯤,  아주 잠깐의 걱정조차 무색하게도 우리의 '계획'에 너무나도 걸맞는 아늑한 해변이 나타났다. 썰물이 밀려가면서 드러난 넓은 모래사장 위에 우리는 장작을 쌓고 모닥불을 피우고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겪는 낯섬과 깊숙이 배여있는 익숙함이 섞여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새로운 공동체를 쌓아 올렸다. 모래 사장은 끝없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눈을 뜨자마자 캠핑카의 아담한 창문으로 바다를 확인하고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한차례 더 밀물이 들어왔다가 나간 자리를 걸었다. 바다였던 자리에는 깊은 물결과 바다생물이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리 신발 벗고 걷자.”

•행동대장•의 명랑한 외침에 다들 잠시 주저하는 것 같더니 하나 둘 신발을 벗고 모래 위로 조심스럽게 맨발을 올려놓았다. 스폰지를 밟는 것처럼 발이 한 뼘 가득 들어갔다. 밤 사이 바다였던 곳에 깊은 발자국을 움푹움푹 남기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숨겨진 곳으로 탐험을 나선 것 같았다. 다시 캠핑카 쪽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따뜻한 볕을 뿜어내고 있었다. 달력은 2월이지만 우리는 여름바다를 즐길 수도 있지. 하지만 갑작스러운 햇살에 미리 준비 되어있을 리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걸치고 있던 두꺼운 패딩은 이제 필요가 없었다. 치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마침 입고 있던 스포츠 브라만 걸친 채 일광욕과 요가를 즐겼다. 캠핑카 앞에 펼쳐놓은 우리의 간이 식탁에는 •도라에몽•이 자그마한 캠핑카 부엌에서 복닥거리며 갖은 재료를 넣어 만든 버섯 트러플 파스타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실컷 우리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난 늦은 아침, 사람들이 모래사장을 채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왠지 뿌듯해진 마음으로 다시 캠핑카에 올라탔다.      



행복에 헤퍼지는 법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니 다음 날은 숲 속에 자리를 잡아보기로 했다. 오름으로 짧은 트레킹을 마치고 캠핑카를 세울 수 있을 만한 야영지를 찾아 나섰다. 전화를 여기저기 돌려 보았지만 캠핑카란 소리에 다들 ‘어렵다’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주었다.


“캠핑카를 빌린 이유가 이럴 때 아무데나 세우고 자라는 거 아니겠어?”


지도상에 ‘숲’이 있을 만한 곳으로 차를 몰고 갔지만 캠핑은 어렵다는 소리에 차를 몇 번은 돌려서 나오던 길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차를 세우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작심하고 차를 돌려 나오는 길에 무언가 텅 빈 야영장 같은 곳을 발견했다. 화장실도 있고 캠핑 데크가 마련된 것을 보니 캠핑 사이트 같은데 아무도 없는 것이 의아해 차에서 내려 공간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부르며 다가왔다. “캠핑하실 거에요~~~?” “네, 저희 캠핑카 타고 와서 차에서 자려구요~~” 서로 메아리 같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점점 가까워졌다. 김무스의 앞머리처럼 긴 눈썹을 가진 할아버지가 우리 눈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은 채 신이 나서 공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오픈을 준비 중인 생태체험학습장 겸 야영장인데 필요하면 하루 묵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더 좋은 데가 있으니 따라와보라고 하시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키 큰 나무가 줄지어 선 콘크리트 도로가 있었다. 야영장 내부에서 목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바라고 상상하던 완벽한 야생적인 이미지 그대로였다. 아무도 없는 숲 속 도로에 캠핑카를 세우고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을 찾다니, 우리는 너무 좋아 말 그대로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상상 속 바로 그 이미지가 눈 앞에 펼쳐지다.
금새 어둠이 깔리며 신비감을 더해주던 배경 속에 저녁 차림을 마친 모습
어느덧 익숙하게 장작을 쌓아올리고 불을 붙이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질문의 밤     


그 밤 장작불이 갑작스러운 비에 사그러든 후, 우리는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일명 I am 카드 게임. 불멍의 밤을 고대하며 카드를 준비해온 •고슴도치•가 능숙하게 설명하며 이끌었다. 원카드처럼 카드를 빨리 소진하는 사람이 이기는데, 카드를 낼 때마다 거기에 적힌 키워드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받은 사람은 대답을 하는 형식이다. 사실상 게임이라기보다는 깊은 대화를 이끌어내는 도구에 가까웠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로는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준 여행지에서의 사건은?”이라는 질문이 나왔다. ‘사랑’이라는 키워드갸 나왔을 때 나는 항상 온화했던 •마미손•의 얼굴이 붉어지게 만드는 질문을 던졌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는 게임의 룰대로 지목받은 사람이 대답했다. 그런데 한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가 대답하기로 했다. ‘장례식’이라는 키워드였고, 질문은 “나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해주었으면 좋겠는가?”였다.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질문의 밤, 남겨진 필름과 우리들


그 질문은 곧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같았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길 바라는가.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가. 질문에 앞서 이번 여행으로 떠오르는 이미지 카드를 뽑았다. 내가 고른 이미지는 하늘로 뻗은 초록의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가는 텅 빈 도로의 사진이었다.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길 위에 섰을 때의 내 마음을 생각했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언제나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것은 나에게 ‘자유’ 그 자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알 수 없음’이 불안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주저하고 머무르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는 오늘 다시 깨닫지 않았는가. 예상치 못한 길로 나를 던져 놓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얼마나 멋진 일들이 벌어졌는지. 우연한 행복은 얼마나 기쁨을 더 크게 확장시켜주는지. 이번 여행은 갑자기 내리는 비 속에서도 어떻게든 불을 피워내고, 당장 오늘 밤 어디서 머물 지 알 수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원하는 길을 찾아내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안정적인 확실함과 매력적인 모호함 중에 후자를 택해가며 자신만의 색으로 시간을 쌓아나가는 사람들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들과 함께 넘치는 우연 앞에 몸을 맡기며 나는 행복에 마구 헤퍼질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나를 다시 발견한다.


우산을 씌어둔 장작불도 이제 연기만 내뿜고 있고, 질문의 밤이 까맣게 깊어간다.

나는 앞으로도 모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스스로 대답했다.     



*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돌보는 밀레니얼 여성들의 베이스캠프, Women’s Basecamp(WBC)는 자연을 사랑하고 아웃도어를 즐기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입니다. 자연 속에서 생활해 보는 ‘캠핑’을 매개로 쉼을 되찾는 라이프 리트릿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womensbasecamp/
* 제주 캠핑카 여행 시리즈 글은 WBC Seoul 팀이 2/14-16에 파일럿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다녀온 내용을 바탕으로 각 크루들의 언어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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