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에 대한 새로운 경험
도라에몽
도라에몽은 스스로를 맥시멀리스트라 부른다. 그리고 실제로 가끔 집의 하중을 걱정하곤 한다. 거주지를 자주 옮기며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던 어느 날, 가진 것이 너무 많다며 돌연 미니멀 라이프를 선언한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그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도 우리의 희망적인 도라에몽은 필요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 있는 것들로 만족하는 노멀리스트가 되기를 꿈꾼다. 오늘도 그녀는 3개의 베개 중 하나를 택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잠이 든다.
금요일 21시 50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중얼거리며 공항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주일 간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침부터 새벽 1시까지 진행되었던 2일간의 서울 출장, 출장 전 빡빡한 업무 일정, 야근. 안 그래도 무거운 발걸음인데 혹시 쓸 일 있지 않을까 하며 챙긴 (결국 사용하지 않은) 노트북과 여벌 옷가지 때문에 더 무겁게 느껴졌다. 멀리 주차된 차가 보이고 내 심장은 격한 반가움으로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짐을 당장 내려놓고 싶다는 조급함 때문인지 금방 닿을 것 같은 내 차는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던지듯 차에 짐을 내려놓고 집으로 가는 길. 끝나지 않은 고민 하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캠핑하러 지금 갈까 말까? 오늘이 아니면 밤에 모닥불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은데……’. 짐은 뒷자리에 놓여있어도 완전하게 가볍지 않은 이 기분은 왜지? 찝찝한 기분으로 20여분을 달리며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모닥불은 포기하자.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오늘 쉬지 않고 이런 몸 상태로 버티면 오히려 남은 2일을 망치게 될지도 몰라.’ “나는 오늘 갈 수 없겠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서운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몇 분 후 답장이 왔고 크루들은 되려 쿨하게 내일 보자고 했다. ‘괜히 걱정했네.’ 그제야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편안함 때문인지, 나는 곧바로 잠에 들었다.
토요일 아침 7시. 짐을 챙기려고 일찍 일어났다. 스피커, 프로젝터 (결국 사용하지 않은) 등의 전자기기는 물론 여벌 옷가지(역시 다 입지 못한), 식재료 들을 챙기다 보니 큰 두 개의 짐 보따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신나게 달려 크루들이 있는 해변에 도착했다. 자랑스럽게 두 개의 짐 보따리를 풀어놓자, •허당•은“완전 도라에몽이야. 없는 게 없어!”라고 말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만화의 캐릭터는 나에겐 꽤나 익숙하다. 여행을 가든, 일정기간 거주를 하든, 최소 한 번 정도는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게로부터 도라에몽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실판 도라에몽처럼 한 보따리 챙겨 온 식재료로 요리를 하고 이제 슬슬 출발하려던 차, 우리의 너무 성능 좋은 차(^^)가 방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점핑잭을 빌리러 주변 캠퍼들의 텐트를 돌아다니면서 우연찮게 본 그들의 텐트 안에는 거의 집을 옮겨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반부터 온갖(점핑잭 빼고) 집기들이 갖춰져 있었다. ‘캠핑을 할 때 저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것이 캠핑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차에 돌아오면서 내가•마미손•에게 한 말은 “점핑잭을 하나 살까 봐.”였다.
그렇게 방전된 차를 뒤로 하고 저녁과 다음 날 아침에 먹을 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갔다. 최대한 신중하게 고른다고 하면서도 혹시나 부족할까 넉넉하게 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친구들 덕분에 그나마 그 욕망을 절제할 수 있었다. 먹거리까지 장전한 우리에게 남겨진 아주 중요한 하나의 과제는 ‘오늘은 과연 어디서 자야 하는가?’였다. 캠핑카에서 볼일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있거나 아무도 없는 곳이면 좋겠고, 이왕이면 자연 상태에 가까운 곳이길 원했다. 이런 요건들이 하나씩 붙기 시작하자 더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야 ‘그냥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내려서 캠핑하자’는 단 하나의 목적만 남게 되었다.
그렇게 한라산 어딘가를 헤매던 와중에, 정말 운이 좋게 상상과 가장 부합하는 장소를 발견했고 우리는 지체 없이 그곳에 정박했다. 거기서 만나게 된 촌장님과의 우연한 인연으로 장보기 리스트에 빠져있던 고기만큼 맛있는 버섯을 득템 했고, 전기 그리고 깨끗한 화장실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필요를 덜어내니, 모든 필요에 부합한 공간이 우리에게 찾아와 준 느낌이었다. 연신 “대박!!”을 외치며 신나 하던 우리는 기쁨을 잠시 뒤로하고 비가 오기 전 서둘러 저녁을 먹을 준비를 했다. 그릴이 없어 고기와 불 사이 일정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돌을 주워와 쌓았고, 나름 그럴싸한 화덕을 만들었다. 가위가 없으면 칼로, 그럴듯한 조명이 없으면 핸드폰 플래시 라이트로 서로를 비춰주고, 숟가락이나 식기가 부족하면 기다리고 먹여주고 연신 깔깔거리며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저녁을 먹고 한참을 떠들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사람 수보다 부족한 이불 탓에 나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자면 잘 깨지 못하는 나이지만, 강풍이 휘몰아치는 산 중턱의 낮은 기온은 날 깨우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던 중 뭔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을 뜨지 않아도 내가 이전에 깼을 때보다 따뜻하게 자고 있음이 느껴졌다. •행동대장•이 물었다. “너무 춥지?” 나는 본능적으로 체온을 느끼려 •행동대장•에게 더 가까이 웅크렸고, •행동대장•은 그런 내 위로 자신의 두꺼운 외투를 덮어줬다.
강풍 속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 아침이 왔고, 왁자지껄한 캠핑도 끝나고 그렇게 나와 크루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캠핑은 어땠는지 궁금해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나는 캠핑 때 있었던 일들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았다.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캠핑카를 빌렸는지, 차가 얼마나 자주 방전되었는지... 무용담처럼 여러 이야기를 쏟아내다 문득 오래전 캐나다에서 캠핑이 떠올랐다. 칼이 없어서 도끼로 당근을 썰었던 일, 꼬치가 없어서 나뭇가지를 주워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던 기억들이다. 무엇을 갖췄었는지 보다 오히려 무엇이 없었는지가 더 오래 기억되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건 나의 도라에몽적 물건 챙기기의 이면에는 “혹시 없으면, 필요하면 어쩌지?”라는 주문 같은 질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라는 단어 안에는 결핍, 부족에서 비롯되는 불편함을 절대 감수하지 않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가 숨겨져 있던 것이다. 모든 필요를 고려해 온갖 집기들을 챙겨 왔던 그 캠퍼들과 내가 순간 겹쳐 보였다. 없는 필요와 걱정을 상상해가며 모든 것을 갖춰야 한다는 스스로 부과한 압박에 마음을 빼앗겨왔던 것이 바로 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족함이 있었기에 서로 도울 수 있었고, 결핍이 있었기에 친구의 온기를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부족했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여백은 우리들만의 즐거운 추억으로 넘치게 채워졌다. 그래서 다음번 여행 혹은 캠핑 때는 훨씬 가볍게 떠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얼기 설기있는 공백들이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뜻밖에 만나게 되는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즐거움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돌보는 밀레니얼 여성들의 베이스캠프, Women’s Basecamp(WBC)는 자연을 사랑하고 아웃도어를 즐기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입니다. 자연 속에서 생활해 보는 ‘캠핑’을 매개로 쉼을 되찾는 라이프 리트릿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주 캠핑카 여행 시리즈 글은 WBC Seoul 팀이 2/14-16에 파일럿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다녀온 내용을 바탕으로 각 크루들의 언어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