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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Nov 01. 2020

모호한 가능성의 말들

이 빈 자리를 나는 무엇으로 채우게 될까

영화 속에서 청초한 셀린느는 말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는 작은 공간에 존재할거야." 

우리는 사이의 존재. 단언하는 긍정의 말보다 물렁물렁해서 가끔은 내 손아귀를 벗어나 어디론가 튀어나가 버릴 지 몰라 가끔은 불안하기도 한 '모호한 가능성의 말'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꿈꿨다. 언제나 경계에 존재하고 싶었던 나를 A라고 말하거나 B로 단정짓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모호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가능성을 향해 힘차게 손을 뻗었다. 


동동 떠있는 채로 무엇에도 속해있지 않는 자유를 즐길 줄도 알았다.  '모호함'을 불안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는 용기가 그때는 있었다. 


우리는 시궁창 속에서도 별을 바라보는 사람, 

이라는 문구를 노트의 첫 장에 적어넣고 가슴이 뭉클해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의 한 가운데, 낯선 도시의 서점에서 '5년 일기'라는 책을 샀다. 페이지마다 5년 간 같은 날의 기록을 짧게 남길 수 있도록 되어있는 365페이지짜리 빈 노트였다. 아, 5년 뒤에 완성된 노트를 보면 얼마나 뿌듯할까. 그 노트를 처음 적기 시작하던 때의 나는 기대감에 차있었다. 이 책을 완성하면서 나의 30대가 시작된다는 아주 멋진 계획이었지. 

그 서른은 벌써 지나버렸는데 처음 얼마간을 빼고는 텅텅 비어있는 채로 남아 있는 노트를 괜스레 뒤적여본다. 기록하지 않고 지나간 시절은 여든 노인의 이처럼 어딘가 뭉텅 빠져있는 것 같다. 이 사이의 빈 공간에 내가 채울 수 있었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던 나를 자꾸만 그려본다.


지금은 모호함이 너무 버겁고 힘들다. 


모호함이 가능성으로 연결되던 아름다운 세상 속에 있다가 덜컥, 누군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나를 옮겨놓은 것 같다. 불안으로 마음이 좀 먹히는 날들 속에서 나는 아직 A도 B도 아닌 사람인 것이 답답하고, C거나 D, 가끔은 Z가 된 사람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색깔이 없는 사람 같아 조바심이 난다.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일기장을 두고 5년 짜리 일기장을 새로 샀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노트는 매일 한 가지씩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묻는 1월 1일의 질문을 지나 4월 1일의 질문은 "내가 한 거짓말 중에 가장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것은?"이었고 나는 "아무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더이상 현명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선택이다." 라고 써넣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나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가"같은 질문은 너무나 대답하고 싶었지만 쓰지 못해 비워두었다. '만족스러운 답을 적을 수 있기 전까지 비워두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지금 무엇이라도 써두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일기장을 덮는다. 


가능성을 위한 자리를 비워놓는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서늘해졌다. 내년도 같은 날짜에 나는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될까.


질문은 던져졌고, 나는 다시 힘을 내어 고민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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