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타이 Oct 26. 2023

여자를 잘못 만난 사무장 O

내 것이었어야 해

“사무장님, 이건 우리 마누라가 가져다 드리라고 하네요"

최사장이 테이블 위로 봉투를 들이민다. 거지같이 굴러먹던 놈이 여자를 잘 만나더니 꽤나 기름칠을 했다.


집에 들어가면 매일 이혼해 달라 서류를 들이미는 김점순의 얼굴이 떠오른다. 여자를 잘못 만났다.


처음 최사장을 만난 게 90년대니, 벌써 얼추 10년이다. 오랜 인연이지만, 강산보다 변한 최사장과의 관계가 탐탁지 않다.


의료기기 회사의 영업부 부장을 그만두고 가진 돈을 몽땅 투자해 정형외과를 개업했다. 벌써 두 번이나 이혼을 한 김점순과 굳이 재혼한 것도 다 사업자금이 부족해서다.


자리를 잡기까지 함께 사업을 시작했던 원장이 그만두는 등 초반 부침이 있긴 했지만, 몇 년 후 봉직의 두엇을 고용하는 어엿한 '사무장'이 되었다.


말이 사무장이지, 병원장이나 진배없다.


공부 잘해서 의사가 되었다는 놈들은 밤낮없이 공부만 해서 그런지 하나같이 말귀가 어둡다. 의사 자격증이  있어도 병원 운영엔 젬병이다.


"사무장님, 저는 김만수 환자 더 이상 진료 못 합니다"

최사장을 만나기 직전 내 방에 뛰어들어와 개소리를 한 닥터 장도 마찬가지다.


안 아프니 진료를 못 해? 허준 나셨네. 막말로 김만수같은 치들 회진이나 한 번 돌고 똑같은 약이나 처방해주면 되는데 그것도 노동이라고. 병원이 의사 자격증으로 굴러가는 것이라고 믿는 작자들에 진절머리가 난다.


병원 하나 세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든다. 그러다 보니 온전히 자기 돈으로 병원을 차릴 수 있는 의사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의료기기 회사나 약국, 아니면 건물주 등에 투자를 받거나 은행에 빚을 잔뜩 얻어 개원을 한다.


간호조무사 월급도 모르는 제깟것들이 무슨 수로 임대료니, 전기세니, 의료기기 대여비니, 소모품 비용을 계산해 가며 수지타산을 맞춘단 말인가. 가만히 누워 소독약 값이라도 벌어준다는 환자를 제 빌로 차내고자 하는 것만 봐도 싹수가 노랗다.


머리 쓸일이 한가득인 병원일을 하느라 매일 늙어가는 나랑 달리 번들번들한 최사장의 이마를 바라보니 허기가 사라진다.


"오늘은 일이 바빠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용건도 있나?"


최사장은 처음만난 그날처럼 배실배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의료기기 영업을 하던 때다.


"당신 누군데 내 방에서 자고 있어!"

술이나 깰 겸 빈 입원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가 자정까지 깊이 잠들어버린 나를 외출했다 돌아온 최사장이 흔들어 깨웠다.


지금이야 최사장이지. 당시 그는 이른바 교통사고 전문 병원의 나이롱환자였다.


"우리 삼겹살 구워 먹으려고 하는데, 같이 드시려오?"

최사장, 아니 나이롱 최는 처음 보는 나를 향해 한 손에 든 까만 봉투를 흔들며 말했다.


"사모님은 계십니까?"

"마누라 죽고 혼자 삽니다"

"그쪽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다 홀아비네"

"어쩐지 들어설 때부터 병원에 소독약 냄새가 아니라 홀아비 냄새만 나더라니"


자정이 지난 야심한 밤, 선술집으로 변신한 정형외과 로비에서 나이롱 환자 대여섯 명과 삼겹살에 소주를 거나하게 걸친 이후 곧 그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영업이라고는 하나 이미 의료기기 사장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중형 병원들 몇 개에 소모품이나 운반해 주고 밤에 의사들과 술이나 마셔주는 일이 전부였던지라 가장 오래 입원 중인 나이롱 최와 가끔 담배나 피우며 시간을 때우거나, 그의 방 침대를 빌려 잠을 잤다.


그런 나이롱 최가 최사장이 된 것은 H 생명에서 일하던 와이프를 만나고 난 후다.


고기나 잘 굽고, 술이나 잘 따르던 나이롱 최는 소득없는 농이나 할 놈이지, 돈 벌 수완이 있는 놈은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그의 와이프는 영리하고 운도 좋았다.


80년대부터 태백에서 보험을 했다는 그녀는 원래 광부의 아내였다. 남편과 슬하에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막장 붕괴사고로 광산 안에서 머리가 깨져 죽어버렸다.


광산에 사내를 보낸 여자들은 그 일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라는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서른 개가 넘는 보험을 들어 대비한 여자는 그녀 하나였다. 천운이었다.


막장 사고로 받은 사망 보험금 4억여원. 사고가 있기 3개월 전 보험을 가입하고 때마침 막장사고라니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톰 하디가 싫은 중학생 L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