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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이 Apr 29. 2024

수정 가능한 삶, 어때요?

당신의 선택은요?

프릭션 볼펜의 광팬이다. 이 펜으로 말할 것 같으면 볼펜인데 무려 지워진다. 별도의 지우개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볼펜 뒤꽁무니에 달린 고무촉으로 문질러 지우면 된다. 지운 티도 안 난다. 열에 반응하는 감온 잉크를 썼단다. 요물이다.


이면지에 낙서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프릭션을 사용한다. 일기 쓸 때도, 단어장 만들 때도, 연애편지 쓸 때도, 일정 기록할 때도 '수정 가능'의 장점은 여지없이 발휘된다. 내 일기장엔 볼펜똥 무더기가 없다. 아무리 흥분해서 썼다 해도 넘쳐흐른 감정을 지울 수 있다. 단어장 만들 땐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흘려 쓴 철자를 고친다. 적어도 나는 알아봐야 하니까, 연애편지만 쓰면 못 생겨 보이는 글씨도 상대방 모르게 여러 번 고쳐쓸 수 있다. 수십 번씩 바뀌는 일정이야 말해 무엇할까.


수정 가능한 프릭션에 홀딱 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니터 아래 깔려 있던 단어장을 발견했다. 영어공부를 안 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 단어장을 오래 방치했나 보다. 그래 오랜만에 한번 들여나 보자. 그런데 이게 웬일.. 프릭션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던 단어장의 단어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다. 지들끼리 작당모의라도 한 걸까. 한참을 사라진 글씨들을 찾으며 뒤적거리다 단어장 표지에서 뜨뜻한 온기를 느낀다. 그렇다 모니터의 열기를 받은 단어장의 글씨들은 꽁무니의 고무촉이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아무리 수정가능하다지만 필기한 내용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당혹스럽다. 그 꼴을 보고 나니 어쩐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생각은 영원히 수정가능한 삶에 멈춘다. 실수해도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울 수 있는, 그래서 완벽해질 수 있는 삶과, 한편엔 똥무더기, 한편에 눈물 자국, 한편엔 흘러넘친 감정들이 쌓여 있는 잊을 수 없는 불완전 중에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까. 당연히 후자다.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런데도 당장은 내 삶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때 그 말하지 말걸, 농담은 1절만 했어야 했어. 화를 참았으면 내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텐데...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후회를 이박삼일을 한다. 


수정할 수 있다면... 그때 그 남자 만나지 말걸, 그때 알바 말고 공부할걸.., 그 친구 앞에선 화내지 말걸... 지금 내 인생보다 엄청 의미 있고 가치 있었을까. 안 살아봤으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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