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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갈 때 꼭 챙겨야 할 것

순풍과 미풍 사이 폭풍 같은 수다

by 마타이

하나. 너무 무겁지 않은 방한용품


오전 10시, 피크 시간은 살짝 지났지만 여전히 붐비는 지하철이다. 봄볕이 느껴진다지만 탑승구에 줄 선 사람들의 표정이 까만 재킷처럼 어두운 걸 보면 이게 통근 시간의 지하철이 맞지 싶다.


시간차를 냈지만 출근시간에 맞춰 바로 회의를 잡아둔 터라 마음은 분주하다.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에 타자마자 어깨가 슬며시 아파온다. 등에 매달린 박배낭은 12kg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인체공학적으로 짐을 싸지 못했나 보다. 상반신만 한 배낭에 1인용 텐트와 의자, 테이블 외에도 추울까 봐 꾹꾹 눌러 담은 동계용 침낭에 패딩, 우모바지까지 한가득이라 빵빵하기까지 하다.


따뜻한 남쪽 제주에서 꺼내보지도 못하고 도로 들고 오는 거 아닌가 불안해하며 챙겼는데, 지난밤 해가 저문 바닷가에 혼자 앉아 자연산 회 안주에 청귤을 넣은 하이볼을 마시며 바닷바람을 맞을 때는 여간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2+1, 교차구매가능이 아니었다면, 쓰디쓴 레몬이 없어 더 행복했을 터다. 덤에 속아 얼마나 많이 적절한 행복을 놓쳤던가.



둘. 믿음직한 정보원


오전 7시, 함덕의 순풍해장국에서 제주공항 인근의 미풍해장국으로 아침식사 장소를 변경했다. 택시 기사님의 추천이다. 로컬맛집 신봉자는 아니지만 어두운 새벽 박배낭을 매고 있는 나를 태우고는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어 좋겠다며, 서울에 가면 어떤 산으로 등산을 가면 좋겠다고 물어온 아저씨는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반쯤 왔을까. 여행에서 등산으로, 등산에서 청와대 뒷산으로, 청와대 뒷산에서 용산으로 주제를 바꿔가며 차근차근 빌드업을 하던 기사님은 "계엄, 그거 대통령이 할만하니까 하는 거다", "중국의 지령을 받은 민주당 반정부주의자들이 국가를 망친다", "한국인의 80%는 중국인이라 공산당 편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만큼이나 발전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국론분열이 아니라 정신분열 수준이다. 그래도 다행히 미풍해장국은 맛있었다.



셋.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


새벽 6시 반, 포근한 침낭 안에서 텐트 문을 열고 해변을 바라봤다. 한참을 기다려도 기대했던 일출이 없길래 바로 다시 가방을 쌌다. 텐트를 펼친 지 12시간이나 되었을까. 다음날 출근 시간에 맞춘 1박 1일의 여행이라니.


아직 시즌이 오지 않은 김녕해수욕장은 텐트가 몇 동 없어 고요하다. 바람 소리에 가볍게 텐트천이 나부끼는 소리, 멀리 들리는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 잔잔한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 더 있고 싶지만 돌아가야 한다.


애당초 와선 안될 여행이었다. 겨우 지지난주에 해외여행에서 돌아왔다. 심지어 항공시간이 변경되는 소동을 겪고 당초 예정보다 하루나 휴가를 더 썼다. 그 주 주말엔 울진에 그다음 주말엔 구례와 광주에도 다녀갔다. 그런데 또 봄바람에 이끌려 제주라니.



넷. 돌아갈 곳


책망하는 사이 환승역에 도착했다. 다시 가방을 들어 올리고 통행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가슴 앞으로 옮겨 든다. 남다른 체력과 힘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백패킹을 하다 만난 친구들은 장비 좀 사라고 한다. 바보들. 니들은 장비만 알고 나는 모른다. 오토캠핑을 하다 7~8년 전쯤 백패킹을 시작했다. 당시 제주 3박 4일 박배낭은 18킬로였다.


다시 등짐 지고 계단을 오른다. 사람맘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가 다른 법이다. 양쪽 어깨에 조상 백 명은 눌러앉은 것처럼 무겁다. 아무래도 경량화를 위해 좀 더 돈을 써야 하나. 고민된다. 아무리 튼튼해도 사십 대 중반을 지나고 있다. 눈 떠보니 사십 대 중반이 된 것처럼 이제 곧 오십이 올 거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백패킹을 하고 있을까.


이제껏 신념처럼 지켜온 거다. 장비빨 세우지 말 것.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 몇을 새로 사귀며 잠시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의 철칙이다. 스쿠버다이빙은 자격증 딴지 20년 가까이 되었고, 매년 해외로 조촐하게 다이빙투어도 다니지만 여전히 아무 장비도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내 원칙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도 저도 아니다. 머무르는 인생도 떠나는 인생도. 사는 인생도 모으는 인생도. 또 잔뜩 등짐을 지고 이곳 아닌가. 사무실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자, 어쨌거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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