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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잃어버린 우산 생각

사시사철 매일 들고 다녀도 부담 없는 일본제 경량 우양산 120g

by 마타이

비가 한 두 방울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집 밖을 나선 후라 내리는 비에 속수무책이다. 우산이 없다는 것. 우산은 늘 가방 속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태리 휴가 이후 우산이 사라졌다. 허구한 날 우산을 어딘가에 두고 다니는 얼빠진 인간이라 편의점 비닐우산 이상은 사지도 않다가, 지난해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눈에 반해 구매한 경량 우산이다. 접었을 땐 한 손에 몸통 전체가 쏙 들어올 만큼 작은데 무게는 120그람이다. 보부상의 가방 안에서 사시사철 자리를 차지하지만, 가장 당당한(?) 물건이다.


실제로 일 년이 넘도록 내 가방에서 잘 지냈다. 기후변화로 깨어있는 동안 비가 퍼붓는 날도 없지만, 마음먹고 길을 나서지 않는 이상 출퇴근 길에는 10분 이상 걷는 일도 여간해선 없었다. 어쩌다 내리는 부슬비는 우산을 꺼내 멋지게 막아내고 다시 실내로 들어갈 땐 우산 커버에 넣어 가방에 쏙 넣으면 그만이다. 집에 돌아오면 활짝 펼쳐 현관에서 바짝 말리고 다시 가방에 고이 접어 넣었다.


이게 대체 어딜 간 것인가. 이태리 여행 내내 어쩜 이렇게 가벼운 우산이 있느냐고 부러워한 엄마가 가져간 걸까? 우산을 말리려고 현관 앞에 펼쳐놓았을 때 이웃이 착각하고 가져갔을까?


함께 한 시간만큼 정은 든다. 그게 120그람짜리 손바닥 만한 경량우산이든, 80킬로그램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남자 사람이든, 어느덧 병의 안쪽 바닥을 드러내버린 향수이든, 여러 번 빨아 입어 어느덧 구멍이 나버린 티셔츠이든, 어떤 옷에나 편히 신어지느라 다른 운동화보다 수명이 절반이상 짧아져버린 회색 운동화이든, 여러 번 매만진 것들에 품어지는 정은 어쩔 도리가 없다.


다시 똑같은 것을 구해도 이전 것의 만족감을 줄 수 없는 이유다. 어렵사리 수소문해 똑같은 물건을 써도 손에 도통 익지 않는다. 아주 맘에 드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몇 개씩 구입한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의아하다. 여러 개나 있는 물건도 귀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좋은 것들은 아쉬워지지 말라고 여럿을 두는 것인가.


정은 보편적이나, 물건에 따라 보편성을 더 인정받는 것들이 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샤넬 가방을 자랑하는 이가 많은 이유는 명품 가방의 만듦새가 좋아 오랜 세월 후에 보아도 허접하지 않은 덕도, 쓰는 이마다 아껴 사용한 이유도, 어느 누구에게 이야기해도 부러움을 사는 보편성도 있겠다.


내게도 엄마에게 물려받은 물건이 있다. 엄마가 아껴 신다가 어느덧 힐이 불편해져서 얼렁뚱땅 물려받게 된 앵클부츠. 샤O 아니고 엘OO, 무려 엘칸토다. 내게 왔을 때도 이미 낡은 것이었던 이 소가죽 구두는 20년이 지난 지금 에나멜 재질로 보일 정도로 반짝거리며 빈티지의 매력을 뽐내고 있다.


자존감은 낮지만 뻔뻔할 정도로 내 것이 소중한 것은 신기할 노릇이다. 황학동에서도 낯설지 않을 이 구두를 지금도 가끔 꺼내 신는다. 부디 내년에도 신을 수 있길 바라며.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남들 손에 있는 수십억보다 내 손바닥에 놓인 10원 하나가 더 소중하다. 우리는 손바닥에 십 원짜리 동전 몇 닢을 쥐고 태어났다.


엄마는 40대 중반에 엘칸토 앵클부츠를 샀다. 스물둘에 낳은 딸, 당시 나는 스물세 살로 백화점 세라 매장에 가서 무려 60만 원이 넘는 롱부츠를 카드 할부로 샀다. 엄마가 신발장에 모셔두고 바라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던 30만 원짜리 전시용 엘칸토 앵클부츠와는 달리, 나의 세라 롱부츠는 전투화가 되어 나와 많은 전투를 함께 치렀고, 가죽이 여러 군데 뜯긴 상태로 장렬히 전사했다.


생활용품의 미덕은 잘 쓰임에 있을 거다. 나는 신발장에서 여전히 늘 처음 같이 깨끗하게 놓여있던 엘칸토 앵클부츠와 내 세라 롱부츠를 번갈아 바라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고, 그때마다 생활용품의 미덕은 잘 쓰임에 있다고 되뇌었다.


50년대에 태어난 부모를 80년대에 태어난 내가 바라보며 애달파하는 것은 부모를 40년 이상 바라보고 사용했기 때문일까. 부모의 낡은 모습에 벌써부터 언젠가 이별할 일이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함께 보낸 많은 좋은 날들을 어렴풋하게라도 기억하기 때문이겠지.


어느 비 오는 아침, 쿠팡 새벽배송으로 받은 메이드 인 재팬 경량 우산은 어차피 내 손에 익지 않은 양품에 불과하니 엄마에게 선물한 것은 분명 별 것도 아닌데, 설마.. 오늘 같은 날도 가방 속에서 그 우산을 꺼내지 않고, 헌 우산을 쓰고 다니시는 것은 아닐지...


비 오는 날, 도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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