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atgrim movi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tgrim May 23. 2018

겹쳐진 레이어를 불태우며

- 영화 <버닝>을 읽는 네 가지 레이어(layer)

(본 글은 매우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은 유의해주세요 ^^)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뒷자리 앉아 있던 아가씨들 두 명의 대화.

“허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게 뭐야! 아 놔 진짜~!”


맞다. 이런 영화, 이런 작품을 아가씨들이 보았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영화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전작과 달리 남자 디자이너가 포토샵을 통해 겹겹이 쌓아둔 레이어를 눌러 만든 그런 이미지 같았으니까. 여자들에게는, 그것도 아가씨들에게는 매우 짜증 나는 영화가 맞다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좋았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포토샵을 제법 쓸 줄 아는 사람은 이미지 사이즈를 조절하거나 약간의 문구를 삽입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전문가라면 레이어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레이어 1, 레이어 2, 레이어 복사, 레이어 삽입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정도여야 하는데, 의외로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활용법이다. 영화 <버닝>은 이창동 감독이 깔아 둔 레이어를 겹겹이 벗겨내어 가며 봐야 하는, 그것도 “남성”이 주체가 된 레이어를 찾아야 한다. 영화 <밀양>과 영화 <시>에서 여성 디자이너의 레이어를 해체해야 했다면, 이번엔 남자다. 매우 남자.

레이어 1.  Masturbation & fantasy

종수가 남산을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 장면에서 여성인 나로서는 그 “기분”을 알 길이 없으니 모호했다. 어려웠다. 그게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모르니까. 다만,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종수의 해미에 대한, 욕망하는 대상에 대한 판타지임은 분명했고, “의도적”으로 여러 회에 걸쳐 그의 욕망이 갈음되는 레이어를 찾아야 한다.


레이어 2.  Burning sunset, burning cigarette
해미의 방에 비친 남산타워의 석양빛이 유일한 빛이었던가. 해미가 아프리카의 석양 이야기를 하며 소멸하고 싶다며 눈물을 흘린다. 벤과 해미, 종수가 대남방송이 끊임없이 들리는 벌판의 석양을 보며 마리화나를 태운다. 또 담배를 태운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극장 안에서 담배 냄새가 날 것처럼 담배를 태워댄다. 종수의 꿈에서 비닐하우스가 타고 있다. 타고 있는 모든 레이어를 봐야 한다.


레이어 3. William Faulkner & Ben 
벤이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묻고 종수는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1897-1962)라 답한다. 이 영화의 원작인 <불타는 헛간>에서도 윌리엄 포크너가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윌리엄 포크너는 곧 미스터리한 남자 벤(Ben)과 닮은꼴이다. 상류층 신분으로 미국 남부 농가의 몰락과 폭력, 일탈과 절망을 소설로 담아냈던 윌리엄 포크너는 벤과 겹쳐지는 레이어가 있다.

.
레이어 4. "어떤 소설을 쓰고 싶어?"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1980)는 「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the Author)」(1968)이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에세이에서 “저자의 죽음에 대한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작품을 생산한 창작자보다 작품을 읽는(감상하는) 독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레이어가 걷히고 마지막 레이어에서 감독이 묻는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 이 영화는 어떤 거지? 벤의 질문 “너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어?”와 겹쳐지며 레이어가 복사되었다. 


마지막.
결코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남성들의 마스터베이션 그 분출의 기분을 안다면 조금은 더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창동 감독이 내게 읽으라고 준 이 소설을 "보며" 나는 감독을 죽이고, 배우를 죽이고, 
새로운 소설을 보는 감상자로, 독자로 탄생되었던 밤을 경험했다.



https://youtu.be/nCwVd8S0miM

매거진의 이전글 그때는 몰랐던, 화양연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