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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Nov 08. 2019

자신감을 위한 미술 수업

- 사포지와 크레파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한다. 세상 현명한 목자가 이끄는 데로 잘 따라오는 양 떼 무리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따로 움직이는 양들이 있는 법이다. 그 한 번의 우연한 일탈과 낙오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리라 해도 상처받은 양은 자신감을 잃게 마련이다. 공교육의 당연함이 누군가에게 사소한 폭력이 된다면 당연하지 않은 사교육으로 다친 곳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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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도 심성이 곱고 상당한 감성지각과 뛰어난 두뇌회전력을 가진 소년 A의 집을 방문하며 함께 사소한 미술 수업을 해 온지 수개월이 지났다. 이 아름다운 소년이 웃으면 거실 끝까지 들이닥친 아침햇살보다 밝은 기운이 집안에 퍼진다. 이 고운 예비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딱 한두 주먹의 자신감이다. 그 햇살 같은 미소가 태양처럼 빛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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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업은 반주먹만큼의 자신감 회복을 위한 미술 활동이었다. 필요한 재료라고는 검은 사포지 몇 장과 어린 시절 쓰다가 만 크레파스들.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았던 적 없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우리나라의 박수근의 삶을 함께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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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문단의 짧은 글 안에는 박수근이 홍차를 좋아하는지 녹차를 더 선호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흐가 키 큰 여자를 좋아했는지 살집이 있는 통통한 여자에게 더 끌리는 지도 적혀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모른다. 오로지 읽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어디서 자랐고 어디서 그림을 배웠고, 어디서 전시를 했다든가, 언제 어떤 큰 상을 받았는지, 어떤 작품들이 얼마의 가격에 판매되었는지 정도랄까. 그것으로 작품을 만든 사람을 알 길은 없어도, 우리는 ‘안다’고 여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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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A에게 물었다. 지금 여기에 적힌 글들로 이 화가에 대해 알 것 같으냐고. 소년은 모르겠다고 답한다. 다시 소년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공적인 행적’만을 기록하여 전달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고. 소년은 조심스럽게 결과가 중요한 것 같다고. 끄덕여주었다. 소년처럼 물고기를 키우는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더라도 어떤 ‘공적인’ 흔적은 분명히 한 전문가의 역사가 되는 일이라고. 그렇게 조금씩 사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광장으로 나서는 일은 의미가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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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남짓,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소년은 별이 빛나는 어떤 밤을 그려냈다. 완성이 되었다며 허리를 펴며 소년이 그 햇살 같은 미소로 내게 말해주길 “의외로 진짜 작품 같아요.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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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어렵지 않게) 완성해본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이 그 누구의 눈에도 편견 없이 “우와, 멋지다!”라는 칭찬을 듣기에 부족함 없는 일이 되면, 잠시 잊었던 힘을 기억하게 된다. 자신감. 소년 A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별처럼 밝고 달처럼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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