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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Oct 31. 2020

맛있게 그림 보기

- 스토리텔링 감상법

누드의 여인이 말을 타고 있다. 낯설고 고전적인 마을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다. 몽환적인 느낌이다. 이 그림이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주고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다양한 대답을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80년대를 지나왔던 사람이라면 ‘애마부인’이라는 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Lady Godiva by John Collier, c. 1897, Herbert Art Gallery and Museum

 

혹 미술사에 대한 나름의 학식이 있다면, 이 그림이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 중 한 명인 존 콜리어(John Collier, 1850~1934년)의 ‘레이디 고디바 (Lady Godiva)’라는 작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혹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서라도 벨기에의 유명 초콜릿 ‘고디바’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눈치챈 사람도 있겠다.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어 보자.


하나의 이미지가 섭취되면서 우리는 다양한 느낌을 결과로 배설한다. 이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그림 감상이다. 그림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것, 나아가서 예술이라는 것 앞에 왠지 우리들은 쉽게 위축될 때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명한 명제 앞에, 나의 무지(無知) 때문에 그림을 감상하기가 두려워질 때도 있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지만, 모르는 만큼 즐길 수도 있다.


 그림 감상,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그림 감상과 관련하여 미술교육학계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미술교육학자 존 데브스 (John Debes)가 처음 ‘비주얼 리터러시 (Visual Literacy)’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시각 이미지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텍스트상의 지식으로 다루자고 주장하였다.


연필과 붓으로 직접 잘 그려낼 줄 아는 것보다는, 그림이나 이미지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비평주의 미술 교육론’이 대두되었다. 이는 마치 그림은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처럼 간주한다는 입장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바로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미술은 한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표현주의 예술 교육론’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갈등하며 논란이 되었다. 그림은 공부해야만 하는 외국어가 아니며, 예술가의 천재성이나 창의력은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도 일리는 있다.


최근의 미술교육에서는 실기와 해석이라는 두 가지 능력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200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비주얼 리터러시는 점차 ‘미디어 리트러시(Media Literacy)’라는 포괄적인 의미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림이라는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가 싶더니, 오히려 온갖 미디어 속에서 이미지는 수천, 수만의 형태와 의미로 분산되어 섭취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이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이 예술을 모방과 창조 사이의 어떤 의미로 고민했던 것조차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제 예술의 의미는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이에 따라 그림을 감상하는 방식도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더불어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재미도 다양해졌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 위해 직접 그림 앞에 가야 했지만, 이제는 다양한 매체로 얼마든지 그림을 접할 수 있고 수집도 어렵지 않다.


그림을 맛있게 섭취하는 방법 중 첫 번째는 이미지를 추리하며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storytelling)’, 즉 그림에서 순간 포착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 리트러시의 감도가 빠른 사람일수록, 즉 이미지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상식을 기초에 두고 해석하는 능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림을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실행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셜록홈스와 같은 탐정가의 시선으로 그림을 뜯어보는 작업부터 시작하게 된다.

앞서 소개한 말을 탄 누드의 여인 그림을 보면서 추리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말을 둘러싼 안장과 휘장의 문양을 보자니 중세시대의 명문가의 말인 것 같다. 빛이 동쪽인 걸로 보아 어쩌면 이른 아침인가 싶다. 화면에 보이는 여인 말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여인은 긴 머릿결을 늘어뜨린 채 손으로 벗은 가슴을 가리고 있으며 조용히 고삐를 쥐고 있다. 질주를 하려는 자세는 아니며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정적인 자태다. 말을 타고 있는 이 여인에게서 약간의 수줍음과 기품이 느껴졌다면 이 그림의 의미가 대부분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체 왜 이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대낮에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을까? 상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림 감상이 주는 재미 중 하나다.


 이 여인의 이름은 고디바 (Lady Godiva, 990년경~1067년), 11세기 영국의 코벤드리 (Coventry)주 레오프릭 (Leofric) 백작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자신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소작료를 부과하자 이들을 동정한 고디바 부인이 남편에게 소작료를 줄여주라고 요청한다. 백작은 아내의 말을 번번이 무시하다가 자꾸 조르는 아내에게 황당한 제안을 한다. 부인 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 거리를 달리면 농민들의 소작료를 감면해 준다는 것. 백작은 내심 정숙한 부인이 벌거벗은 채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인은 ‘대다수 주민들을 위한 공중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이 같은 제의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은 고디바 부인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면서, 그녀가 알몸으로 거리를 다닐 때 모두 창 밖을 내다보지 않기로 결의했다. 부인은 해가 뜨는 아침 7시에 의연히 마을을 돌았다. 이때 호기심 많은 재단사 톰이 약속을 어기고 고디바 부인의 알몸을 훔쳐보고 말았는데, 그 순간 톰은 눈이 멀어버렸다고 전해진다.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인 "피핑 톰 Peeping Tom - 몰래 훔쳐보는 톰"이라는 숙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

1949년에 코벤트리에 세워진 고디바 동상 / 1782년 고디바 기념주화 / 2012년 올림픽 기념 퍼레이드

 

결국 백작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하고 소작료를 낮췄다. 고디바의 이야기는 실화라는 설도 있고 전설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고디바의 행동은 그림과 시, 화폐 그리고 동상으로 기념되고 있다. 또한 고디바 부인의 행동은 ‘일반적 관행이나 상식, 불의한 힘의 역학에 불응하고 대담한 역의 논리로 난관을 뚫고 나가는 정치’를 일컫는 용어인 '고다이버이즘 (Godivaism)'으로 남겨졌다.


1926년, 벨기에의 초콜릿 장인 조세프 드라프스(Joseph Draps)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며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전해져 내려오는 고귀함, 섹시함, 모던함을 담을 수 있는 이름으로 고디바를 선택했다고 한다. 귀족적인 기품 있으면서도 감각적인 매력이 있는 초콜릿의 이름으로는 적합했을 것이다. 


약 1000년 전, 알몸 시위로 정치적 성공을 거두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고디바 이야기를 알고 다시 그림을 보면 이제 색다른 재미가 있다. 




흔히 미술작품이라 하면 색채 찬란한 유화나 수채화 같은 서양화만 떠올리곤 한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과거 우리나라 미술교육이 서양미술 편향이었던 탓이 크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미술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 추상화까지 이어지는 서양미술사의 대강은 알면서도, 정작 한국미술과는 친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선조가 남겨놓은 그림들 중에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작품들이 정말 많다. 그중 하나, 김홍도의 <노상파안(路上破顔)>을 꼽겠다.

<노상파안>은 김홍도의 유명한 풍속 화첩 중 하나다. 밑도 끝도 없이 “길 위에서 미소 짓다”는 제목만이 이 그림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그러나 오히려, 정해진 이야기가 없기에 우리는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다.


어린아이를 안고 소를 탄 아낙네, 그 뒤를 쫓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와 큰 갓을 쓴 양반네 일행과 길에서 마주친 장면이다. 등장인물은 총 6명, 등장 동물들은 소, 말, 망아지, 닭, 총 4마리 되겠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묘한 것이 3명의 어른들 시선이다.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린 큰 갓 쓴 양반은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지 분명하지 않다. 머리 쓰게를 살짝 들어 올리는 여인과 눈이 마주친 것인지, 아이와 닭과 짐까지 등에 업고 땀 흘리며 걸어가고 있는 (아마도) 남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양반네가 큰 말이 아닌 작은 조랑말을 타고 가는 탓에 어딘가 품새도 한량스러운 기운이 있다. 조랑말을 몰고 가는 소년 몸집의 몸종은 앞으로만 시선을 둘 뿐 지나가는 행인 가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조랑말이 3월에 새끼를 낳아 5~6월까지 젖을 물린다고 볼 때, 이 장면은 한창 싱그러운 녹음이 시작되는 깊은 봄, 흔히 젊은 여인의 마음이 깨나 뒤숭숭해진다는 계절, 봄이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미소는, 어쩌면 걸어가는 와중에도 굳이 젖을 먹겠다는 양반네의 어린 망아지에게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김홍도의 <노상파안>은 조선시대의 한가로운 봄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따뜻한 마을 어귀 풍경의 ‘스틸컷(still cut)’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불량한 상상을 조금 해 볼까? 부채로 얼굴을 가린 양반네의 응큼한 미소와 서방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봄바람 난 여인네의 남녀상열지사 한 장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치 스냅사진 한 장처럼 순간의 상황만 남겨진 이 그림에서 작가 김홍도는 묘한 미소를 던져주고 있다.


앞서 보았던 <레이디 고디바>가 “아는 만큼 새롭게 보이는” 그림이라면, <노상파안>은 “아는 것이 없어도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그림이란 무릇, (이론과 역사와 작가를) 알아도 즐겁고 몰라도 즐거운 감상으로 마주하면 된다.


그림 속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고, 이를 통해 감동하는 것은 행복한 감상이 된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한 짧은 상상만으로도 한 편의 드라마, 소설, 영화가 가능해진다. 그림뿐만 아니라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쏟아지는 광고 이미지, 매일 쓰는 제품에 새겨진 로고 디자인의 이미지들도 그저 쳐다보는 것을 넘어, 그 뒤편의 무언가를 상상하는 훈련을 한다면 21세기의 화두,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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