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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Oct 17. 2020

마녀의 배려

- 오헨리의 마녀의 빵

큰 아이가 태어난 이후 초등학교 3학년까지 거의 십 년 동안 남매를 양 옆에 끼고 내가 책을 읽어주는 일종의 ‘잠 의식(sleep ritual)’을 했다. 그 세월 동안 기억나는 여러 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남매들이 가장 귀를 쫑긋하며 더 들려 달라며 잠을 미루어 내려 애썼던 책이 있었으니, 오헨리(O. Henry) 단편선이었다. 딸아이가 유독 좋아했던 이야기, <마녀의 빵 (Witches' Loaves)>, 다들 알 것이다.


제법 규모 있는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지만 삶이 바빠 결혼을 못했던 노처녀 여사장이 ‘가난하고 고독한 화가’로 보였던(실제로는 건축가였던) 남자를 ‘배려’한답시고 빵 속에 버터를 발라 두어 건축 공모전을 앞두고 있던 그를 망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워낙 품질 좋은 지우개가 많지만, 실제로 20세기 중엽까지도 그림 작업의 지우개를 식빵으로 사용했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지금은 사업적으로 성공한 싱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적지만, 막 20세기로 접어든 미국이 과연 그러했을까. 만무하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오헨리의 <마녀의 빵>이 보여주는 “배려”와 “오해”의 풍경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기에 아, 명작이다 싶다.


공모전 하루 전 날 공들였던 작품이 버터 때문에 망가졌으니, 이 젊은 남자의 절망이 이해는 간다. 시대상을 반영하여 생각했을 때, 여사장이 자신의 호의를 대놓고 티 내지 못하고 살포시 애정 담뿍 담아 빵 사이에 버터 한 조각을 넣어두었던 마음, 늘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의 이 사내에 대한 연민으로 시전 했던 나름의 배려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결과는 참 비극이지 않은가.


지금 우리에게도 이 비슷한 순간이 있다.

나는 “배려”였고 나는 “너를 생각해서”였는데, 돌아온 결과는 “네가 어찌!” 혹은 “너 때문에!”인 무수한 사건 사고들, 우리 일상에 널리고 널려 있지 않은가. 전체 플롯을 다시 뜯어보면 사실상 “모조리 네 탓!”이라 할 수 없는 사연들과 근거들이 곳곳에 있더라. 우리의 일상 속 인간관계도 쉬운 게 없다.


내가 잘 모르는 ‘타인’을 위한다는 것, 거기에 사랑이나 정의나 우정 등등의 것을 얹어가며 우리는 “너를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빵 가게 여사장처럼 전혀 고의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조리 망가진 어떤 장면을 인생에서 한 두 번쯤 만나게 마련이다. 그만큼 “배려”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아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우리 삶의 팩트다.


나의 배려를 저 사람이 오해했다며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상대방을 제대로 잘 몰랐던 것이 먼저 벌어진 실수다. 내가 타인을 잘 알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오해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만 인정한다면, 우리는 “나의 배려가 너의 똥이 되는” 사건을 조금 덜 만나게 될 것이며, 설령 이래저래 난리 개판 오 분 전 순간에 서 있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툭툭 털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거 어렵다. 매우.)


<빵 굽는 여인> (1854),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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