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 시에서 북서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소도시 알링턴(Arlington)에는 알링턴 주민들이 자랑거리인 사이러스 달린(CyrusE. Dallin, 1861-1944) 미술관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사이러스 달린은 네이티브 아메리칸(Native American), 즉 미국 원주민들을 (인디언) 모델로 한 인류학적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담하고 소박한 미술관에 들어서서 둘러보니, 110년 전의 인디언 상들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했으며, 흙으로 빚었음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합니다.
그러나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어떤 화려한 조명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창틈으로 쏟아지던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던 한 누드의 여인입니다.
묘지의 석상으로 제작되었던 이 작품은 ‘레테(Lethe)’ 또는 오빌리온(Oblivion)로 표기하지만, 알려지기로는 그리스 신화에서 물총새가 되었다는 여인, 알키오네의 누드상입니다. 죽은 남편을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린 후 죽음을 기다리는, 레테의 강물로 머리는 물에 젖었고 이제 곧 망각의 상태로 들어서기 직전의 여인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망각의 심연을 기다리는 처연한 자태의 풍만한 한 여인이 내 앞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이토록 젊고 싱싱한 풍만함이라니.
그 어떤 누드가 이처럼 풍요롭고 달고 시원하며 아늑했던가요.
수줍은 듯 잔뜩 머금은 저 에로틱한 떨림.
절벽에서 떨어져 마디마디 부서진 아픔조차 망각케 하는 사랑.
멈추어 서서 바라보면서, 오비드우스의 슬픈 노래를 기억합니다.
<로마의 시인 오비드우스(Publius Ovidius)가 노래했던 케익스와 알키오네의 이야기>
테살리아의 왕, 케익스의 아내이자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딸인 알키오네. 이들 부부의 사랑은 신들이 질투할 만한 것이었고 한다. 그러나 테살리아에서 연이어 발생하던 재앙들을 신들의 저주라 여긴 테살리아는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 클라로스로 뱃길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바람신의 딸이기에 바람의 무서움을 알고 있던 알키오네는 그에게 제발 가지 말라고 간청하지만 케익스는 아내를 달래며 두 달 안에는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난다. 그러나 결국 폭풍에 휘말려 케익스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시신이라도 아내 곁에 가게 해달라고 빌며 바다에 빠지고 만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알키오네는 헤라에게 매일같이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고, 이를 딱히 여긴 헤라는 자신의 전령 이리스를 시켜 꿈의 신 모르페우스로 하여금 알키오네의 꿈속에 남편으로 둔갑하여 그의 죽음을 알려주게 한다. 절망한 알키오네는 남편과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만다. 헤라와 신들은 이를 안타까워하여 뛰어내리는 알키오네를 물총새(물새)로 변신시켰다. 물총새가 된 알키오네는 남편의 시신에 입을 맞추었고 케익스 역시 물총새로 변하여 다시 함께 할 수 있었다.
사이러스가 프랑스에서 앙리 샤퓌(Henri Chapu, 1833~1891)에게 조각을 배울 당시,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에 심취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누드상에서 보들레르의 시, <망각의 강, 레테>가 보입니다.
<망각의 강, 레테>
오라, 내 가슴 위로, 매정하고 귀먹은 사람,
사랑스런 호랑이, 시름겨운 모습의 괴물;
내 떨리는 손가락을 오래오래 파묻고 싶다,
네 묵직한 갈기 깊숙한 곳에;
네 향기 가득한 네 속치마 속에
고통스런 내 머리를 묻고,
마치 시든 꽃 냄새 맡듯 내 사라져 버린
사랑의 감미로운 흔적으로 냄새 맡고 싶다.
나는 자고 싶다! 살기보다는 차라리 잠들고 싶다!
죽음처럼 포근한 잠 속에서,
후회 없이 입맞춤 쏟으리,
구리처럼 매끈한 아름다운 네 몸에다.
내 흐느낌을 진정시켜 삼키는 데는
심연 같은 네 잠자리만 한 게 없다;
강한 망각이 네 잎에 깃들이고,
네 입맞춤엔 망각의 강이 흐른다.
내 운명에, 이제 내 희열로 여기고,
나는 운명론자처럼 순종하리;
나는 온순한 순교자, 죄 없는 수형자,
열정이 형벌을 부추겨도,
내 원한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빨 것이다,
네팽테스와 맛있는 독당근을,
일찍이 정이라곤 품어본 적 없는
이 뾰족한 귀여운 젖꼭지 끝에서.
Charles Baudelaire, Les Fleurs du Mal, 1857
윤영애, 『악의 꽃』, 문학과지성사, 2009, p. 341.
미국 근대 조각사를 대표하는 사이러스 달린 (Cyrus E. Dallin, 1861-1944)는 한국인들에게는 잘 안 알려진 조각가이지만, 미국 보스턴미술관 (Museum of Fine Arts) 정문 앞에 위용으로 가득한 그의 말 탄 인디언 상을 아시는 분들은 많을 겁니다. 1861년 미국 유타주에서 태어난 사이러스 달린은 어린 시절부터 미국 원주민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고, 그 영향 아래 많은 인디언 조각상을 남겼습니다. 스위스 베른에 있는, 몰몬교를 상징하는 ‘나팔 부는 천사’도 그의 작품입니다. 사이러스는 프랑스에서 조각을 배웠으며 유럽에서 많은 당대의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유럽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1900년에 매사추세츠 알링톤에 정착하여 부인 비토리아(Vittoria Murray)와 함께 세 아들을 키우다 83 세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 양궁선수로도 출전하여 동메달을 따기도 했던 그는 스포츠맨이자 독실한 몰몬교 신자였고, 지역에서 존경받았던 예술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