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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Oct 30. 2017

여성 궁정화가가 남긴 두 뺨의 기록

- 두 개의 자화상

마리-가브리엘 까페 (Marie-Gabrielle Capet) 자화상 (1783),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두 뺨에 꽃잎 물 번지는 어여쁜 아가씨다. 누가 보아도 미인이라 부를만한 18세기의 귀족 아가씨의 초상화처럼 보이지만,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은 1783년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정식 등록한 세 번째 여성 화가 마리-가브리엘 카페 (Marie-Gabrielle Capet, 1761~1818)가 그 해 완성한 자신의 자화상이다.(이미지-댓글2) 버터 바르는 빵 칼이 아니라, 뜨개실 꿰 놓은 바늘 대신 그녀는 파스텔을 왼손에 들어 보여주며 외치고 있다. “나, 마리-가브리엘 카페, 화가입니다!”라고.

 

마리-가브리엘 카페는 평민 출신으로 프랑스 리용(Lyon)에서 태어났다는 기록 외에는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기록은 없다. 그녀가 20세가 되던 1781년 당시 이미 유명세를 얻고 있었던 귀족 출신의 여성 화가, 아델레이드 라빌-기아르 (Adelaide Labille-Guiard, 1749~1803)의 제자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카페가 아델레이드의 제자가 될 당시의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아델라이드 외에 또 다른 천재 여성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ée-Le Brun, 1755~1842)과 쌍두마차로 여성 화가의 가능성이 막 열리던 때였다. 이 두 여성과 마리-가브리엘 카페, 그리고 마리 마거릿 카로(Marie Marguerite Carreaux), 이 네 명의 여성은 1783년 5월 31일, 동시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공식 등록된다.


아델라이드와 비제 르 브룅, 이 두 여인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집권기에 이르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아델레이드 라빌 기아르 (Adelaide Labille-Guiard) <두 제자와 자화상> (1785),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이 네 명의 여성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아델레이드는 당시 최고 궁정화가였던 프랑수아 뱅상(François Vincent)의 연인이기도 했는데(이후 늦게 결혼하여 아델라이드는 마담 뱅상으로 불려진다), 남자의 유명세가 아닌 스스로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델라이드가 그린 <두 제자와 자화상>(1785)에는 35세의 당당한 여성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제자였던 마리 가브리엘 카페와 마리 마거릿 카로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델레이드와 쌍두마차 격으로 거론되었던 또 다른 천재 여성화가였던 엘리자베스 루이제 비제 르 브룅은 유독 마리-앙투와네트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브룅은 아델레이드와 마찬가지로 많은 귀부인들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좀 더 사교적이고 귀족적인 면모에 초점을 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리-앙투와네트는 왕에게 비제 르 브룅이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가입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리-앙투와네트와의 친분을 이유로 프랑스혁명 후 브룅은 프랑스를 떠나 러시아로 망명에 올라야 했던 비운의 화가였다.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 (Elisabeth Louise Vigée-Le Brun) 자화상 (1782)


아델레이드의 행보는 브룅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1790년 초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며 아카데미에 더 많은 여성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운동을 벌였고 이에 대한 연설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와네트가 처형을 당한 후 궁정 여성화가들의 입지도 위태로워졌고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러시아로 망명을 택했던 브룅과는 달리 아델레이드는 아카데미에 남아 여성 후학을 키우며 남성 회원들의 수모와 멸시를 맞서는 쪽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아델레이드 곁에는 여동생처럼, 딸처럼 자신을 보필하던 수제자 마리-가브리엘 카페가 있었다. 아델레이드는 마리-가브리엘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같은 집에 함께 살면서 임종 때까지도 함께 했다.







마리-가브리엘 카페가 두 뺨에 꽃잎 물 번지는 듯한 첫 자화상을 그린 후, 18년의 세월이 흐른 1808년. 카페는 의미심장한 또 한 편의 자화상을 남긴다. 여러 남성 궁정 화가들 사이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스승 아델레이드와 이를 돕고 있는 카페 자신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연출하였다.

마담 뱅상의 아틀리에 (Marie-Gabrielle Capet) (1808) Neue Pinakothek, Munich.

이 작품은 나폴레옹 체제 새로운 내각인 상원의원 복장을 한 팔순의 궁정화가 조제프-마리 비앙(Joseph-Marie Vien, 1716~1809)의 초상화 작업을 하고 있는 아델레이드와 카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제프-마리 비앙은 당대 최고 명성의 화가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다소 초췌해 보이는 웃음기 없는 스승 아델레이드 뒤편으로 그녀의 남편 프랑수아 뱅상이 작업에 훈수를 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왼편에 서 있는 무리의 남성들은 뱅상의 아카데미 제자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나머지 남성들도 화가들이거나 아카데미 관계자들로 보인다. 이들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흥미로운 것은 정면을 응시한 카페의 모습이다. 18년 전 꿀이 가득한 진주 빛 피부결을 가졌던 탐스러운 아가씨의 얼굴은 이제 없다. 스승 옆에서 물감을 개어주고 있는 백발이 어슷한 중년의 어시스턴트 모습이다. 미간의 주름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약 7~8년 전 스승 아델레이드가 병환 중에 임종 직전 마지막 작업을 했던 당시 상황을 카페가 그린 것으로, 스승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자 존경의 ‘오마주’로서 남긴 작품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에 유일하게 눈을 맞추고 있는 카페의 모습이 보인다. 스페인 궁정 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보이는 작품 구도와 유사한 구도의 이 작품에서 화가가 화자(話者)로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 주목해 본다면, 이 여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 아프게 울린다.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1783년 네 명의 여성 회원을 받아들인 이후, 단 한 번도 새로운 여성 회원을 등록시키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여성 회원들을 늘리고 권리를 확장하고자 노력해왔던 스승 아델레이드와 마리-가브리엘의 노력은 그저 무수한 남성 회원들에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목숨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프랑스 혁명기와 남성 중심의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결국 남성들의 훈수나 듣고 있는 스냅사진과 같은 작업 풍경 속에서 두 여인의 뺨에는 세월의 피로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는 답습하지 않는 법이다. 과거의 빛나던 자화상을 초로의 빛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비견할 만큼 카페는 처연한 자기 기록이자 삶의 기록으로서 자신을 작품으로 그려냈다. 그 힘, 그 속에 생생히 전달되는 숨결이 예술이 주는 에너지인 것이다.

 

300년 전에 사망한 여성 화가가 남긴 두 개의 자화상에는 빛이 가득한 두 뺨의 젊음이, 그리고 헝클어진 백발의 주름진 마른 두 뺨의 늙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래전 남성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직업 화가로서의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그녀들의 젊음과 패기, 그리고 아픔과 인내가 녹아든 카페의 두 뺨을 다시 본다.

 

오늘날 현대 여성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두 뺨에 대한 기록이다.




참고한 이야기들

- “라비유 기야르(Labille-Guiard)와 비제 르 브룅(Vigee-Le Brun)의 초상화에 나타난 여성성 연구”, 윤민주, 정금희, 한국기초조형학회, <기초조형학연구> 18권 2호 (2017), pp.381-393
https://bjws.blogspot.kr/2011/03/women-artists-self-portraits-french_1123.html
http://www.bobmoulder.net/custom-url



Beethoven -Moonlight Sonata (FULL) - Piano Sonata No. 14

https://youtu.be/4Tr0otuiQ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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