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쓰고 추억 일억 벌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떠났던

by 신하영


일억짜리 추억이 있다



부산 기장에서 해안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한적한 동네에 도달할 수 있다.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많은 부동산 투자자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일광이 바로 그곳이다. 몇 년 전 나는 친구와 이곳을 다녀오며 “좋은 여행이었다.”라고 얘기했었다. 해운대에서 줄곧 자라 내가 서울에 오기 전까지 늘 붙어 다녔던 녀석은 어느 날 내게 어디론가 좀 떠나자며 메시지를 보냈다. 마침 일상이 지루했던 참이라 나는 알겠다고 했고 우리는 가까운 여행지를 찾다 일광을 발견했다.


기상청에서 호우주의보를 띄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땐 지금보다 더 젊었으니 아무렴 어땠을까.

작은 해수욕장이 딸려있는 동네라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에겐 제격이었다. 드레스코드는 부랑자. 준비물은 꼬깃꼬깃 만 원짜리 한 장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일광에 도착한 우리의 모습은 동네 주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겨웠다.(오래된 백 팩을 메고 캡 모자를 눌러쓴 뒤 촌스러운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었다.)


역에서 나오니 다른 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몽글몽글한 설렘을 안고선 무작정 바다를 향해 걸으며 우린 옛 정처에 취했고 열심히 서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줬다. 그때 당시만 해도 겉멋에 취해 SNS에 ‘나 오늘 여기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걸 했어요.’라는 글을 올리기 바빴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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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것들



이 곳 저곳을 구경하다 발견한 낡은 칼국수 집에서 눈이 돌아 해물파전에 막걸리 두 병을 단숨에 비워버리고 배를 두드리며 바다에 도착했다. 글쎄, 아무도 없어 황당했지만 우린 이때다 싶어 모래사장을 휘젓고 다녔다. 아마 호우주의보라는 걸 새하얗게 잊어버렸나 보다. 나뭇가지로 전 애인의 이름을 쓰고 도망가고 웅덩이 사이로 점프를 하다 바지가 젖고 짧은 상황극을 하며 배가 터지도록 웃었다. 목이 말라 주머니에 있는 잔돈을 확인하니 천 원짜리 두 장과 백 원짜리 다섯 개가 있었다. 높은 텐션으로 막걸리를 한 병 더 마신 탓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표 값만 남긴 채 물 한 병을 사고 다시 길을 걷는다.

길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 등대를 지키는 강아지와 놀고 낚싯배를 정리하는 어부와 버려진 폐선 앞에서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노을을 바라본다. 일상에서 잠시 멀어졌을 뿐인데 우리는 “좋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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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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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바지


밤이 찾아오니 주변이 제법 어둑해진다. 전봇대가 없어 길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지만 작은 집들 사이로 나오는 희미한 불빛들이 용케도 길을 밝혀주었다. 저 멀리 소나무 숲이 보여 거기까지 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거기가 군부대일 줄은 누가 알았겠나. 죄송하다고 소리치며 총이라도 맞을까 부리나케 도망을 쳐 나오며 이제 돌아가자는 말을 꺼냈다. 몇 시간을 걸으니 발이 아파왔다. 웃고 떠들며 걷느라 소화가 다 된 배를 붙잡고 아귀찜 집 앞에서 콧구멍만 벌렁거리며 돈이 생기면 꼭 여기에 다시 오자고 말을 한다.


전망이 좋은 곳에 나란히 앉은 뒤 울퉁불퉁한 바위에 위태롭게 핸드폰을 놔두고 함께 사진을 찍은 뒤 발걸음을 돌렸다. 그제야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몸은 녹초였지만 우리는 음악을 틀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역으로 향했다.

실로 알찬 여행이었다.


P20170406_184907998_19745014-BA1B-4803-951B-08658B63EB96.JPG 일억짜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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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린 각각 9800원을 썼다. 만원을 채 쓰지 않은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이백 원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만원의 행복을 느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완성한 일기 위에 ‘오늘은 만원 쓰고 추억 일억 벌었습니다.’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가끔은 그 날 친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어쩌면 그리운.) 서로의 낭만을 뮤지컬처럼 이야기하며 걸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청춘이었고 제법 맑았었다. 지금 녀석과 술잔을 부딪치며 그때를 이야기하면 그저 웃음밖에 흘러나오지 않는다. 한순간도 잊지 않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행복했단 이야기겠지.

그때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우린 더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함께 18일 동안 태국을 여행했다.


추억을 갉아먹으며 살고 있는 우린 또 다른 여행을 가기 위해 오늘도 열렬히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언젠가 웃는 모습으로 여행길에 오를 때 우린 그때와 같은 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겠지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