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의미가 없어진다
하위권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늘 같은 질문에 부딪힌다.
의지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걸까,
공부를 못해서 의지가 없는 걸까.
그 아이들은 대부분
‘지금 하는 일’에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의미가 없으니 흥미도 없고,
흥미가 없으니 집중도 되지 않는다.
결국 짧은 즐거움,
즉각적인 자극만 찾게 된다.
게임, 유튜브, 친구들과의 잡담 같은 것들.
그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다.
희망이 없을 때 생기는 자기보호 본능이다.
“괜히 열심히 해봤자 또 혼나겠지.”
“어차피 못할 텐데 뭐 하러 해.”
이런 말들이 그 방어막이 된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며 깨닫는다.
공부를 못해서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가져도 될 이유를
아무도 그려주지 않았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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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학생이
수학 시쓰기 대회에 나갔다.
그 학생은 자신감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함께 준비해보자며
나는 주제를 잡고 초고를 다듬었다.
시를 완성한 후, 나는 말했다.
“이 정도면 시상 할 수 있겠다.”
그 말에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제가 어떻게 상을 타요.”
순간 웃음 속에서 묘한 낯섦이 느껴졌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한 번도 목표를 가져본 적 없는 마음의 습관’이었다.
그 말투에 담긴 거친 당황스러움은
희망을 잃은 아이가 보여주는
익숙한 자기방어처럼 들렸다.
그때 알았다.
하위권 학생에게는 공부법보다 먼저
‘희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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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생명력이고,
활력이자 열정이다.
희망이 있어야 의지가 생기고,
의지가 있어야 방법이 작동한다.
희망이 없는 학생에게
‘공부하자’는 말은 공허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함께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성적보다
‘그릴 수 있는 미래’를 먼저 말해준다.
“이번 시험은 힘들겠지만, 내년에는 수학 성적이 달라질꺼야.”
“너라면 충분히 상 받을 수 있어.”
그 말들이 단순한 위로나 칭찬이 아니라
가능성의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학생이 스스로를 믿기 시작할 때,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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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성장시키는 일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희망을 전염시키는 일이다.
그 희망이 자라
의지가 되고,
그 의지가 다시 방법이 된다.
나는 오늘도 교실에서
아이들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 속에
조용히 피어오르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